독도 ‘한국독립의 상징, 우리 겨레 영해 닻’
초대 대통령 종신제 개헌안 발의로 3선 성공
이승만은 철저한 知美主義者인 동시에 반공주의자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여유를 주었다. 그 결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및 비준을 촉구한 이승만의 요청을 미국이 전격 수락했다. 1953년 8월 8일 경무대에서 가 조인에 이어 10월 1일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명함으로서 정식 발효됐다. 이 조인으로 이승만은 미국과의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함께 싸울 수 있게 됐다.
“독도는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의 품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모든 한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위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 영해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승만은 모든 정부요인들, 그리고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군들과 뭉쳐 나라를 지키는데 원동력이 됐다. 리즈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은 자기 국민에 대한 편애가 심했고 마음에는 애국심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불가능한 일을 끊임없이 요구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요 학자이며 정치가이자 애국자”라고 평가한 밴 프리트 장군은 <라이프>잡지에 “그는 거의 2년간 평균 1주일에 한 번씩 나와 함께 온갖 역경을 마다 않고 전방을 찾았다. 추운 날 지프를 타야 할 때면 죄송하다는 내 말에 미소를 지으며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그의 밝은 얼굴과 외투 밖으로 보이는 백발은 검은 구름 위에 솟은 태양처럼 빛났다”고 썼다.
1954년 7월 26일 미국을 공식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단상에 섰다.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한국은 통일되지 못하고 공산세력의 위세만 과시해주었다”고 미국을 비난했으며 “우리는 기어이 우리들의 계획을 달성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1954년 초대 대통령의 종신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어 사사오입을 적용하므로 1956년 3선에 성공했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부정 선거를 감행, 4선이 됐지만 4. 19 의거로 하야했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은 하와이의 요양원에서 쓸쓸히 서거했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치른 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1969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됐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