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불효죄와 나의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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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십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나 심청이 같은 오늘의 효자가 있을까. 첨단의 과학시대 부모를 내팽개치는 불효자가 비일비재하다. 나도 장남으로서 부모님께 불효막심한 아들이다. 인생 여든 중반고개 마루에 서서 후회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 아버지 66세, 어머니 88세에 돌아가실 때 내 머리에 솟구친 시조 한 수가 있다. <조선조 송강 정철 1535-1593>의 훈민가 16수 중의 하나인 다음 옛시조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일란 다 하여라/지나간 후면 애닲다 어찌하리/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이 시조가 부모님 별세에 눈물나게 했다. 지금 고향 경남 함양 마천 선영에 흙이불 덮고 주무신다. 아우와 함께 가끔 산소에 벌초하며 참배하긴 하나 그게 무슨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소박 진실한 농부 광부 노동자였다.

일본까지 가셔서 노동일로 번 돈을 고향 부모님 모시는 숙부님 앞으로 보내 주셨다.

아버지는 효자였다. 나는 좀 배웠다고 교만했다. 배울수록 불효하고 안 배울수록 효도한다는 말이 각박한 오늘의 세태를 잘 말해 준다. 함양읍내 살 때 아버지는 지리산 기슭 마천으로 갈치 장사를 하러 가느라 높은 오도재 고개를 넘을 무렵 산비탈길에 떨어진 두툼한 돈주머니를 하나 줍게 되었다. 필시 주인이 찾으러 오리라 생각하고 갈치 상자 위에 덩실 얹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함양장터에서 황소 판 돈주머니 잃은 사람이 오도재를 넘어와 아버지를 보자마자 “내 돈줌치<돈주머니> 못 봤는기요” 충혈된 눈으로 바라볼 때 “갈치 상자 위에 잘 가져 왔소” 말하니 “아, 돈줌치가 여기 있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 돈주머니 임자는 먼저 오도재를 다시 넘어갔다. 마천에 가서 갈치를 다 팔고 온 아버지가 여름날 가마니 깔고 앉아 마당에서 아침밥을 먹을 때 주운 돈주머니를 임자에게 잘 돌려 준 이야길 하셨다. 다 듣고 난 어머니가 “당신은 바보 멍텅구리라요. 그까짓 갈치 팔아 봐야 몇 푼 남는다고 그만 그 돈 집으로 가져와서 처자식을 잘 먹이제”라는 말로 아버지 가슴을 푹 찔렀다. 아버지는 “아이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제, 나는 막걸리라도 고맙다고 한잔 사 줄기라 생각했제 그 사람 참 허망한 사람이데”라고 대답한 아버지는 쓸쓸히 웃었다. 어머니 농담 말씀에 이토록 진실한 아버지는 우리 5남매에게 거짓없이 착하게 살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는 아버지 말씀에서 참 삶을 배운 것이다. 어머니는 사육신 하위지 후손으로 조실 부모하고 삼촌 집에 살다가 15세에 지리산 마천 산골 빈농의 오문달 25세 총각에게 시집온 것이다. 가난한 농촌생활 속에서도 뼈있는 진주 하씨 집안 자손임을 내세우시며 “자식만은 쪽박을 차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신념이 뚜렷하셨다. “너희 5남매는 뼈 있게 살거라” 힘주어 가르쳐 주셔서 우리 형제들은 인생살이 뼈삶을 배운 것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참삶, 뼈삶을 배우고 내 스스로 빛있게 살자는 빛삶을 교육철학으로 만들어 나의 평생 학생교육의 교육철학은 참삶 뼈삶 빛삶으로 확정되어 있다. 비록 글은 몰라도 인생의 양심과 진실을 일깨워 주신 아버지의 참삶교육, 한글을 해득하시고 동네 부녀자들 가끔 편지도 대필해 주신 진주 하씨 어머니는 자존심도 강하시고 맹모나 한석봉 어머니 이상으로 교육목표와 신념이 강한 훌륭한 어머니였다. 하나님 부모님 은혜로 나는 대학원까지 공부했다. 감사할 뿐이다. 아버지는 전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나와 아내의 기도와 전도로 화성교회 집사님으로 신앙생활하시다가 2007년 가을에 하늘나라 가셨다. 생각할수록 훌륭한 우리 부모님인데 따뜻하게 효도 못한 불효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 실천을 못한 죄로 송강 정철의 시조 속의 “평생에 고쳐 못할 일”도 생생하게 생각나서 가슴 깊이 아픈 회개와 후회의 날을 보내고 있다. 진방남 가수가 “불효자는 웁니다” 노래하면 나도 불효자로 울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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