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친 문재흥(文在興, 1910~1984) 집사께서는 경술생(庚戌生)이시니 생존해 계시다면 금년에 만 112세가 되신다. 나라를 일본에 송두리째 빼앗기던 경술국치(庚戌國恥)의 해에 태어나시고 그 지긋지긋했던 태평양 전쟁과 6⋅25를 겪으시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모두 섭렵(涉獵)을 하셨으니 한 평생을 불운했던 시대를 사시다가 가신 분이라 생각하면 이 자식의 가슴이 새삼 답답해져 온다.
더더구나 당신께서 불행했던 것은 6⋅25의 와중에 창궐(猖獗)했던 나쁜 병 ‘장티푸스’로 아내까지 잃었으니 실로 앞이 캄캄할 노릇이 아니었겠는가? 살던 집은 포화에 맞아 불타버리고 얼마 안 되는 농토에 농사를 손수 짓느라고 고생하시던 모습이 자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조석의 끼니를 손수 지어 어린 자식들을 먹이시랴, 농사일 하시랴, 동네 반장 일 보시랴, 경황이 없으셨을 텐데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사셨을까 하는 아버지의 회한(悔恨)을 자식의 입장에서 미루어 헤아려 보게 된다.
1950년 6월 하순, 갑자기 공산당이 밀물처럼 쳐 내려오는 바람에 꼼짝 없이 온 식구가 경기도 광주(廣州)인 고향에 묶여있다 보니 낮에는 들에서 일하시고 밤에는 밑도 끝도 없는 공산당들이 주최하는 회의에 불려 가시거나 한강 모래사장에 동원되어 탄약상자를 지게로 져 나르시느라고 시달리시던 모습이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어디 그뿐이랴? 수도서울이 수복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겨를도 없이 최전방 전투현장에 작업대로 끌려가셔서 한 달 가까이 국군과 미군의 부상병을 운반하는 일로 고생을 하시던 중, 유탄(流彈)이 작업복 윗도리의 단추를 꿰차고 나가는,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한 사선(死線)을 넘으시기도 하셨으니 어찌 보면 기구한 운명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선친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회고할 때마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不可思議) 수수께끼 한 가지가 있다. 선친께서는 지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번도 당신의 처지를 불평하시거나 누구를 원망하시는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항상 웃는 얼굴로 현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사시던 분이셨는데 당신의 그 여유 있는 삶의 모습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한강 상류, 지금의 팔당댐 쪽으로 이어지는 길가에 좁고 길다란 우리 소유의 밭 한뙈기가 있었다. 해마다 절반은 참깨와 목화를 심었고 나머지 절반은 고추를 심었는데 아이들은 달콤한 목화 다래를 따먹느라고 우리 밭에 몰래 드나들었고 어른들은 경안천(京安川)에서 피라미를 잡아 생선회를 먹을 때 안주용으로 풋고추를 따가곤 하였다. 주인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지은 고추농사를 불법으로 약탈(?)해 가는 이 불법 침입자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었다. 내가 이따금 밭에 나가 망을 보지만 그 나쁜(?) 침략자들은 주인의 엄중한(?) 감시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바구니에 수북이 풋고추를 따가곤 하였다.
나는 침입자의 명단을 정확히 머릿속에 입력시켜 놓았다가 저녁에 그 약탈자들의 명단을 구체적으로 아버지께 보고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버지는 매번 빙그레 웃으시며 반복하는 말씀이 있다. “그 아저씨들 참 못 됐구나! 그러나 정일아, 너무 속상해 할 것 없다. 그래도 그 아저씨들 보다는 우리가 더 많은 고추를 먹게 될 테니까.”
선친께서는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 이후, 모교회인 분원감리교회에 출석하시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다. 새벽잠이 없으셨던 어르신께서는 새벽마다 성경책을 마치 삼국지(三國志)를 읽으시듯 독특하고 구성진 곡조의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시던 모습이 귀에 선하다. 당시 고향의 교회는 민혜림(閔惠林, 1923~2007) 女목사님이 담임을 하셨는데 어느 날 고향을 방문했을 때, 교회에서 목사님을 뵈었더니 “주일 낮과 저녁예배, 삼일저녁예배, 그리고 금요 속회에 지난 1년간 한 번도 결석이 없는 다섯 분 중에 선친의 명단이 들어 있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선친께서 지켜 오셨던 그 신실하셨던 믿음의 역사는 우리 문중(門中)이 대대로 소중히 간직해야 할 유산이 되어야 하리라고 다짐을 해 보는 것이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