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현미경, 망원경, 내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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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상황(대상)을 보면서도 입장에 따라 전연 다른 반응(대책)을 보일 수 있다. 공작새를 볼 때 날개를 보는 사람은 ‘가장 아름다운 새’라고 하지만 발목을 보는 사람은 ‘가장 추한 새’라고 할 것이다. 물이 반쯤 담긴 물컵을 보면서 “반이나 차있네”할 수도 있고, “반이나 비었네”할 수도 있다. 친딸을 볼 때는 장점부터 보고, 며느리를 볼 때는 단점부터 본다는 옛말도 있다.(지금은 달라졌지만···) 우리 눈을 어디에 고정하는가에 따라서, 또 기준이나 선입견에 따라서도 이런 현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사실(fact)이 15%, 반응(response)이 85%를 좌우한다고 말한다. 곱게 보려고 마음먹으면 ‘곰보도 보조개’로 보이고, 밉게 보려고 마음먹으면 달걀같이 생긴 발뒤꿈치도 시비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동일물(同一物)의 이면성(異面性)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선(善)으로 된 것도 없고 절대악(惡)으로만 된 것도 없다. 섞여 있는 것이다. 모래와 쇳가루가 섞여 있는 흙 한 줌을 놓고 자석을 대면 쇳가루는 붙어 나오고 모래는 그냥 남겨지는 분류지점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종말적 심판’이라 부른다. 그래서 다툼 속에는 진리가 거할 수 없다. 남과 다투는 것은 내 영혼과 다투는 것이요 남과 멀어지는 것은 내 양심과 멀어지는 것이다. ‘울림’은 행운에 기대는 삶이고, ‘어울림’은 행복을 부르는 삶이다. ‘울림’은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스타의식에서 나오고, ‘어울림’은 ‘나도 저들과 같다’는 평민의식에서 나온다. 스타에게는 ‘울림’이 있지만, 평민에게는 ‘어울림’이 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과 어울리면 곧 하늘과의 어울림을 체험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홀로 고고하게 살기보다 낮은 곳에서 많은 이와 어울려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사마리아인은 환란을 겪고 있고 이름 모를 이웃을 시의적절하게 필요한 것으로(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돕고 나눔으로 모범시민이 되었고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아름다운 스토리로 남이 있게 되었다(눅10:30-37). 직진하면서 순항하던 삶이 갑자기 막힐 때가 있다. 건강에 이상이 있어 입원하게 되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거나, 인간관계에서 예상밖의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 직진하다 ‘우선 멈춤’이나 ‘우회도로’를 따라가야 할 때가 있다. 바울의 사례가 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2차 전도 여행을 하며 터키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회당중심 사역을 펼쳤는데 예상외로 헬라 사람들과 로마인들까지 구주 예수를 믿는 성과가 나타났다. 그로 인해 소아시아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게 되었고 디모데까지 선교팀에 합류해 순풍에 돛 단 듯 만사형통이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성령이 이 길을 막았다. 환상을 통해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유럽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 인도를 따라 순종했고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선교의 새 장을 열었던 것이다. 유럽선교의 관문인 빌립보에 들어서자마자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다. 감옥에 갇혔을 때, 옥문이 저절로 열리는 기적이 발생했고, 뒤이어 데살로니가아 뵈레아 지역까지 교회가 개척되는 선교역사가 이어졌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즉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하나님)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시아 선교의 길을 막으면서 유럽선교의 길을 열어주셨다. 헬렌 켈러는 말했다. 하나님은 현재의 문을 닫으면서 반드시 미래의 문을 열어 놓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문만 바라보기 때문에 미래의 문을 보지 못한다.” 미로 속에 있으면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위(비행기 타고)에서 보면 출구가 보인다. 미시적으로 보다가 거시적으로도 보아야 한다. 현미경으로 보다가 망원경으로도 보고 내시경으로 나 자신도 보아야 한다. 그중 어딘가에 하나님의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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