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33) 우남 이승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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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적 이해·집착으로 원자력연구소 문 열다

기독교 국가 발전, 아시아서 평화 이룩 기원

그는 군목제도, 형목(刑牧)제도를 도입했으며 장관급 고위직 47.7%를 기독교인으로 임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던 꿈을 실천했다. 이승만의 국가 기초는 기독교였다. 그리스도인 이승만에 의해서 기독교 문화가 발전했다. 탁월한 국제적 식견으로 미래를 보는 이승만의 혜안이 빛났다. 원자력에 관해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해 선구적인 이해와 집착으로 1959년 원자력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1960년 봄 4.19가 일어났다. 자유당의 장기 집권 획책에 대한 시민, 학생, 지식인들이 저항했다. 그해 3월 15일 선거에서 이기붕이 부정해서 부통령에 뽑힌 것이 도화선이었다. 데모대와 경찰의 충돌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승만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몸소 병원으로 달려가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면서 학생들을 위로했다. 단 한 번도 4.19를 비난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선거를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고 했다.

마침 조선일보는 이승만이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가는 모습을 꼼꼼히 스케치했다. 이화장으로 향하는 이승만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부인과 함께 연도의 시민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민들은 이 박사의 차가 지나갈 때 박수했으며, 경호하는 차, 경무대 지프 그리고 보도차들이 뒤따랐다. 그 후 5월 29일 아침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은 이승만 내외를 모시고 김포공항에서 하와이로 휴양과 치료를 위해 전송했다. 그러나 국내 신문들은 이승만이 망명했다고 보도했다. 허정은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1979, 샘터)에서 이승만과의 이별을 “이 박사를 떠나보낸 나의 마음은 쓸쓸하기만 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우리 현대사의 거인이고 나에게는 잊지 못할 은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우남의 경우를 통해 사람은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기록했다.

이승만의 실패는 ‘나만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재자란 말을 들었다. 사사오입을 했을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만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 여겼으면 양보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자신이 이룩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럴 만하기도 하다. 그러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므로 보다 더 훌륭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승만은 식사 때마다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했다. 또 아침마다 서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민족이 사는 데야”하면서 바라보았다. 이승만은 자신이 대한민국과 생명을 같이 했다고 한 것이 그의 진실한 고백이었다. 민주주의 국가로 탄생시켰고 기독교 국가로 발전했으며 아시아에서 평화를 이룩하고자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이시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끊임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면서 태평양의 고독 속에서 저물어 갔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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