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25 무렵 서부 경남 명문 함양중학교를 다녔다. 전시 중이라 음악교사가 안 계셨다. 중 3학년 때 함양읍에 헌병대장으로 부임한 육군대위 부인이 우리 학교 음악교사로 오셨다. 1953년도 중3 2학기 때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지은 애국가부터 가르쳐 주셨다. 계명 곡명 등 자세하게 나라사랑 노래부터 가르쳐 주셔서 참 고마웠다.
지금은 잊었지만 그때 배운 애국가 계명대로 풍금도 타 보았다.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오신 음학 선생님은 젖먹이 아들이 있었다. 가정부가 학교로 젖먹이러 오면 짖궂은 우리 3-2반 학생들이 음악 선생님 젖보러 간다고 학교 뒤에서 조용히 젖먹이 아들 젖먹이는 여선생님 모습을 훔쳐 보곤 했다. 사춘기 중학생들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음악선생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안타깝다. 예쁜 20대로 보이던 음악선생님은 노래를 하나 더 가르쳐 주셨다. 가곡 <옛 동산에 올라>였다. 노산 이은상 <1903-1982>의 시조가 노랫말로 가곡이 된 것이다. 이 가곡을 잘 배웠다. 우리반 학생들은 선생님의 독창을 정중히 요청했다. 학생들 요청에 따라 그날 따라 더욱 곱게 한복 입은 음악선생님은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로 시작되는 가곡을 2절까지 학생들이 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곱게 잘 부르셨다. 그때 한 학생이 “참 잘한다” 감탄조로 말했다. 자그마한 김창순 친구였다. 그 순간 여자 음악선생님은 “뭐, 잘한다? 내가 술집 기생이야, 여선생이라고 깔본거지.” 몹시 화가 난 여선생님은 울면서 교무실로 가셨다. 금방 황기 체육선생님이 오셨다. 솥뚜껑만한 주먹으로 김창순 학생 볼을 두어 번 쥐어 박으며 “임마, 너 여선생이라고 무시해서 그런 소리 한거지” 잠깐 야단 치시고 교무실로 데려 갔다. 사춘기 중학생이 누님 같은 고운 여선생님 간드러진 노래에 흠뻑 취해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목소리를 낸 것으로 본다. 중 3 2학기에 여자 음악선생님에게 우리 애국가와 가곡 <옛 동산에 올라> 두 곡을 잘 배웠다.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늘 그리운 음악선생님이다. 그런데 나는 1970년대 중반쯤의 어느 여름날 김창순 중학동창을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반가웠다. 우리는 근처 찻집에 마주 앉았다. 나는 20여 년 전 일로 기억되는 음악 여선생님 노래 감탄 사건으로 체육선생님 따라 교무실로 갔던 친구의 뒷소식이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김창순 친구에게 교무실로 갔던 뒷일을 물어 보았다. 황기 선생님 책상 옆에 꿇어 앉아 있던 김창순 친구는 황 선생님이 변소 가셨을 때 목조건물 단층 교무실 창을 뛰어 넘어 집으로 도망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친구들과 함께 함양읍내 황기 선생님 댁을 찾아가 장독대를 향해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고 했다. 황 선생님에게 뺨 맞은 앙갚음이요, 사춘기 학생의 저항심리가 발동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광화문 찻집에서 우연히 만나 차 한잔을 나누었던 김창순 친구의 소식은 지금까지 알 길이 없다. 내게는 음악선생님이 귀하던 6.25 무렵 잠깐 시간 강사로 함양중학에 출강하시어 곧 졸업하게 될 우리 중 3 학생들 음악지도 잘해 주신 그 여자 음악선생님이 늘 고맙고 그립다. 이름은 나의 중 3 일기에는 적혀 있겠지만 1956년도 가을에 숙부댁이 화재를 만나 그때 중 3, 고 1, 고 2~3년치 일기가 재가 되었다. 나의 한참 사춘기 때 쓴 중 3 일기가 타버려 일기에는 쓰여 있을 그 고우신 젊은 음악 여선생님 이름을 알아낼 수 없다.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애국가를 잘 가르쳐 주셔서 고맙게 생각한다. 그때 배운 애국가 지은이는 친일인사 윤치호 선생이 아니고 내가 흥사단 애국가 작사자 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여러 단우들과 10여 년 연구 결과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으로 확고하게 결론내렸다. 세월의 연륜으로 보아 나의 함양중학 음악 여선생님도 이제 하늘나라에 계실 것으로 생각된다. 고우신 모습 지금 내 가슴에는 살아 계신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