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시 강원도 삼척 부근의 한 ‘실버타운’에 묵고 있다. 이 실버타운은 바닷가의 자그마한 양로원인 셈이다. 오래전부터 바닷가 갯마을의 허름한 낡은 집 하나를 빌려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끼니’ 해결이 문제였다. 평생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살았는데 내손으로 살림을 한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묵는 ‘문학마을’ 같은 곳에 가기도 꺼려졌다. 20대 때는 절[寺]에서도 생활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게 힘들 것 같다. 그래서 택한 곳이 ‘실버타운’이었다. 공동식사를 하는 그곳에서는 밥 문제가 해결이 되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은 아내는 이제 싱크대 앞에서 해방을 시켜 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복합적인 이유로 나는 실버타운의 방을 빌려 묵으면서 드넓은 푸른 바다가 펼쳐진 그곳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 노인들을 둘러보았다. 아무 말 없이 혼자서 밥을 먹는 7, 80대의 노인들이었다. 살아온 세월들이 고목나무 ‘등걸껍질’같은 모습이 그들의 얼굴에 묻어나 있었다. 나는 그 노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연륜(年輪)의 “지혜의 도서관”을 들여다본다.
어제는 실버타운에서 묵는 80대 중반의 한 노인 의사와 갯마을 식당으로 내려가 점심을 함께 먹었다. 체구가 아담하고 인자한 눈빛을 가진 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50년 동안 의원을 해 왔어요. 그리고 삼척에 있는 이 실버타운에 들어왔죠. 부산에서도 바닷가에 살았지만 여기 바다의 물빛과 파도가 좋아서 여기로 왔어요.” 이 노인은 물빛과 파도를 얘기할 정도로 감성이 촉촉한 어른이었다. 노인은 실버타운 안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노인들의 건강을 무료로 상담해 주고 있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서 들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지식으로 노년에 그렇게 봉사하는 것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이 말을 계속했다. “여기 동네이름이 ‘삼척’입니다. 이 지명이 주는 메시지가 있어요. 이곳에서는 ‘세 가지 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ㅡ 그러니까 자기자랑을 하지 말라는 거죠.” 노인은 에둘러서 내게 겸손을 말해주었다. 당연한 말씀이었다. ‘아는 척’하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척’하기 때문에 없는 사람의 원한이 생긴다. 또 세상의 대부분의 비극은 그 원인이 ‘잘난 척’에 있는지도 모른다.
노인이 말을 계속했다. “80년을 넘게 살다 보니 세상이 참 좋아졌어요. 예전 가난하던 시절에는 물건을 놓아두고 가면 누군가 바로 그걸 가져가 버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바닷가 벤치에 자기 핸드폰이나 모자 같은 물건을 놓고 가면 하루가 지나도 그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아무도 가져가지 않아요. 젊은 시절, 미국이 그렇다고 해서 부러워했는데 우리나라가 그렇게 됐어요. 얼마나 좋아진 겁니까?” 노인은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걸 알려주고 있었다.
노인이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엄 변호사는 역대 대통령 중, 어떤 대통령이 좋았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의 구멍 난 양말을 영부인 ‘프란체스카’여사가 알전구를 넣고 기웠구요. 박정희 대통령은 수세식 변기의 물을 아끼기 위해 벽돌 한 장을 넣어두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발가락에 구멍이 난 스타킹을 신었고, 또 방문이 뒤틀어져 잘 열리지 않자, 양초를 칠해서 부드럽게 하고 그냥 썼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검소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성경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을 강조하고 오만함을 탓한다. 유교가 ‘충효(忠孝)’이고 불교가 ‘자비(慈悲)’라면 기독교는 ‘겸손(謙遜)’의 종교인 것 같다.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은 사람으로 세상에 와서 머리를 둘 곳도 없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다. 그게 겸손의 극치(極致)가 아닐까? 아름답고 즐거운 생애란 겸손의 생애가 아닐까? 겸손이 아니고는 평화도 만족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글 잘 쓰는 법조인(法曹人)으로 널리 알려진 엄상익(嚴相益, 1954~ ) 변호사의 글이다. 그는 고등학교의 학력이 평준화되기 이전, 경기고등학교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거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글을 전문으로 쓰는 문장가를 능가할 만큼 글을 재미있고 쉽고 맛깔스럽게 쓴다. 특히 그의 글에서 은근히 풍겨나는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참으로 좋다. 어느 60대 목사가 어느 80대 장로의 글을 치켜세우면서 썼다는 표현이 생각난다. “장로님, 글 잘 쓰는 것이 죄라면 장로님은 사형감입니다.” 내가 인용하고 싶은 말이다. “글 잘 쓰는 것이 죄라면 엄 변호사를 무기징역에 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