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6조보다 더 큰 사랑의 밑천 6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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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봄 오동춘! 처음 듣는 내 이름이 우스웠다는 안송희는 곧 나와 애인 사이가 되었다. 주일 수요일 밤예배가 끝나면 서강대가 들어 서기 전의 노고산 달밤을 즐겼다.

숭문 중·고교 앞을 지나 당인리 발전소가 있는 한강변까지 산책하고 강변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그 때 내가 4.19를 겪은 대학 국문과 3학년이어서 문학 이야길 많이 했다. 푸른 한강둑에는 군데군데 연인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통금 시간에 쫓기는 우리 귀에는 마포종점 전차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사랑은 머루알같이 익어 갔다. 1961년 12월 27일 연세대 강당 졸업식 자리에 산칠교회 이창훈 전도사(전 숭의여대 학장)를 비롯 나의 애인 안송희 남매 등 교인 7명 정도가 참여하여 나의 졸업을 축하해 주었다. 고마웠다. 나는 5.16 군사정변 뒤인지라 병역미필자로 취직이 어려웠다. 모두 다투어 군에 입대했다. 부산 집으로 내려간 나는 경쟁 높은 해병모집 시험에 합격했다. 1962년 8월부터 진해에서 고된 해병훈련을 잘 받고 자랑스런 작대기 하나 이등병이 되었다. 가입대로 1주일 숙식만 할 때 그 어느 한밤 경화동 바닷가에 아무 계급도 없이 쉬고 있는 우리 앞에 엠원소총에 대검 꽂고 팔각모 쓴 건장한 해병 이등병 하나가 경상도 사투리말로 “야, 천하 쫄병들아! 천하에 느그들 밑에는 아무도 없는기라 알긋나” 고함치는 큰 소리에 우리는 기가 죽었던 일이 있다. 그런데 그 해병의 작대기 하나가 내 어깨에도 자랑스럽게 놓였다. 132기로 이등병이 된 나는 하나님 은혜로 해병진해기지사령부 영선중대로 배치되어 3개월 근무하다가 해병진해기지사령부 정훈참모실 주최 반공웅변대회에 출전하여 1등상을 받았다. 황의구 정훈참모는 나를 정훈참모실로 발탁해 가며 해병진해주보 편집업무를 맡겼다. 내 시도 발표해 가면서 진해주보를 잘 편집 발행하고 전국 해병부대에 발송했다. 해병생활하면서 서울 염리동에 사는 애인 안송희에게 자주 사랑편지를 띄웠다. 안송희 편지는 조금 뜸하게 와서 내가 많이 기다리곤 했다. 나는 어느 주일날 타자지 14장에 나의 사랑고백을 하루종일 써서 발송했다. 우체부가 “이게 편지요 소설이지”하며 대문 안에 편지를 주고 갔다는 말을 서울로 휴가 왔을 때 들었다. 서울에 휴가나오면 나와 애인은 마포 동막으로 산책가고 한강둑에 나란히 앉았다. 숭문 중·고교 앞을 지날 때 돌다리가 하나 있다. 나뭇가지가 추위에 떠는 어느 날 밤 그 다리를 지나며 우리는 그 다리를 파리의 미라보 다리로 이름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하면 꼭 첫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오안열’로 첫 아들 이름을 지었다. 오(吳)는 아빠 성이요, 안(安)은 엄마 성씨요, 열(烈)은 오씨 항열이다. 우리는 마치 결혼한 부부처럼 맏아들 이름부터 지어 놓았다. 그리고 때로는 애인에게 ‘안열 엄마에게’라는 제목으로 아내에게 편지하듯 서울로 편지를 띄웠다. 

제대를 앞두고 휴가 나온 나는 애인과 ‘슬픔은 그대 가슴에’ 흑인 비극의 영화도 보고 고궁도 가 보고 가난한 애인 우리는 대화를 엮으며 주로 걸었다. 덕수궁에서 우리는 탁구를 치고 대한문 앞에 섰을 때 용산 군용열차 타러 가려는 나에게 안송희 애인은 1원짜리 동전 한 닢에 서울 4.19 거릴 뛰고 와 스스로 지은 나의 아호 송골(松骨)이라 써서 사랑 선물로 준다. 나도 급히 군복바지에서 짚혀나온 5원짜리 동전에 애인 이름 송희(松姬)라 써서 주며 “남자니까 5원을 주는 거야”말하며 이어 나는 “우리 1원과 5원 이  6원돈은 6조보다 더 큰 사랑의 밑천이야 잘 간직해 둬”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사랑의 밑천 6원으로 우리는 1965년 결혼하고 이듬해 4월 4일 미리 이름 지어 놓은 오안열 첫아들을 하나님이 주셨다. 뒤이어 딸과 아들을 주셨다. 나와 아내는 사랑 밑천 6원을 바탕삼아 지금 주님 사랑 속에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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