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장신대를 가리켜 사람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있다. “한일은 일본과 어떤 관계인가요?” 실은 우리 한일은 일본과 그 어떤 인연도 관계도 없다. 한일은 원래 두 개의 서로 다른 여자성경학교가 합병된 학교이다. 전주의 한예정성경학교(설립자 마티 잉골드 테이트 선교사, 한예정)와 광주의 이일성경학교(설립자 엘리자베스 쉐핑, 이일)가 각각 1923년과 1922년에 설립되었는데, 1961년 두 학교가 합병되었을 때 한예정의 마지막 교장이었던 고인애(코라 웨이랜드) 선교사가 교명을 두 학교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한일”로 명명하게 되었다. 당시 이일의 졸업생은 이일신학교로, 한예정의 졸업생은 한예정신학교로 불리기를 원했다. 두 학교 모두를 대표하기 위해 처음에는 한예정의 ‘예’와 이일의 ‘일’을 가져 와서 ‘예일’로 하려고 했다 한다. 그러나 ‘예일’의 영문표기가 미국의 ‘Yale’과 같으며, 또한 학교가 교육 목적인 복음 전파와 교육 사역을 섬김의 정신에 두고 있기에 예일과 동일한 이름 대신 ‘한일여자신학교’가 새 교명이 되었다.
이후 한일은 섬김이라는 신앙적 삶의 정신과 실천을 교육목표로 삼고 호남 기독교 역사에서 여성 지도자(전도부인과 여전도사) 양성에 지대한 역할을 감당해 올 수 있었다. 또한 한일여자신학교는 남녀 공학의 한일신학교(1982)로, 다시 한일신학대학으로 그리고 지금의 한일장신대학교로 발전하면서, 목회자를 비롯하여 사회복지사, 상담심리사, 음악가, 간호사 그리고 운동재활사 등 과거 설립자들의 신앙적 유산인 ‘섬김 정신과 실천’을 물려받은 ‘행복한 목회자와 기독교 전문인’들을 육성하여 우리 사회의 꼭 필요한 일꾼으로 배출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일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초기 선교 활동 시기(1922-1974) 미국 남장로교회가 파송한 14명의 여선교사 교장들은 목사가 아닌 간호사 의사 전도사로서 오로지 헌신과 희생으로 학교발전에 진력하였으나, 정작 한국 교회나 신학교의 정책을 결정짓는데 여성이요 목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일제하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기도 하였고, 6·25전쟁으로 잠시 휴교하는 등 학교의 명맥을 이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대학인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수학한 동문들이 상급학교 진학이나 신학대학원 진학의 길이 막혀 어려웠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한일은 지난 100년 그 어떤 역사의 질곡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학교로서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의 종합대학 규모의 신학대학교로 서 있게 되었다. 단시간에 이루는 성공과 부흥에 열광하는 한국사회의 일반적 기대와는 달리 한일은 지방의 외지고 소외된 지역에서 차별과 억압 아래 놓여 기회를 얻지 못한 여성들과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섬김의 가치에 역점을 둔 기독교적 교육과 돌봄의 산실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오늘의 한일이 있기까지 그 초석을 놓은 여러 여선교사들과 여성동문들의 공로와 업적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연구하여 계승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 경제,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모든 기회와 혜택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반면 그 점에서 날로 쇠약해지는 지방의 현재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늘 한일은 결코 묻힐 수 없는 귀한 신앙적 유산인 섬김의 정신과 실천을 교육의 핵심 가치로 강조하며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관련 과목들을 중심으로 교육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한일의 정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성경적인 하나님의 요구이자 명령이며,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강조하고 몸으로 실천해 할 기독교의 참 유산이다.
개교100주년을 맞이하는 2022년의 한일, 단순히 과거의 한일이 아니라 앞으로 미래100년에도 이와 같은 섬김과 나눔의 정신으로 무장한 한일인들이 이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를 한껏 기대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오늘에 이르게 하신 한일이 오늘의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결코 놓치지 않고 지켜가야 할 정체성이며 사명일 것이다.
채은하 총장
<한일장신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