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로 나날을 보내던 시절 ②
어려운 형편, 중학교 진학 못해
일하며 독서 몰두, 중학교 독학
구연동화로 흥미·재미·교훈 줘
‘생명의 존엄’ 사상에 심취해
명함도 찍고 서류 양식도 인쇄하는 그런 조그만 인쇄소 외무원 수입으로 여덟 명 식구가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너 해 뒤에 태은 씨는 새로 용천인쇄 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바뀐 그 회사의 전무가 되지만, 여전히 생활은 펴지지 못했다. 광은 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때는 생활이 어려워 진학할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용암포에는 구세학교도 있고 수산학교도 있어 중등 교육기관은 눈앞에 보였으나, 광은은 중학교에 진학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형이 경영하는 용천 인쇄소에서 일하며 시간만 나면 독서에 열을 올렸다. 그 누구보다도 꿈이 많던 광은 소년은 독서로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에누리 없이 그는 세계 문학 전집은 물론이려니와 세계 사상전집까지 통독했다. 그 당시 일본의 신조사(新潮社)에서 간행한 서른여덟 권짜리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 너무 지나친 독서로 해서 그는 끝내 시력이 아주 나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해박한 지식은 바로 그때 축적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암담하기만 한 때였다. 조국은 일제의 통치하에 있었고, 광복의 서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광은 소년은 계속 무지개를 따르고 있었다. 광은 소년은 주일이면 교회에서 형인 태은 집사가 대장으로 있는 소년 척후대 대원으로서 망국의 소년으로서의 서러움을 달래었다.
어쨌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에디슨을 보라. 뉴턴을 보라. 나도 이대로 좌절만 할 수는 없다!)
광은 소년은 일본 와세다 대학 출판부에서 간행하던 <와세다 중학 강의록>을 주문해, 중학교 과정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나 광은 소년은 지나친 책벌레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 광은이 책을 덜 보아 건강을 해치지 않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광은 소년은 특히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量彦)의 작품들을 애독하였다. 훗날 황 목사는 가가와의 저작은 거의 다 읽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가가와 목사는 사상가요 작가로서도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고베 신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해 고베의 빈민굴에 들어가 기독교적 사회사업을 폈다.
가가와의 대표작인 소설 ‘사선(死線)을 넘어서’는 베스트셀러로 독자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고, 예술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던 작품이다. 그것은 소설이라기보다 작자의 체험기로서, 그 시대의 풍조와 순교자적 기백이 넘치고 있다. 즉, 이른바 순수 소설이 아니라 현실 참여(앙가지망)적인 작품이었기에 광은 소년은 더욱 그 작품을 몇 번이고 읽고 읽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고 억눌린 자와 더불어 지내기를 좋아하던 광은 소년으로서는 가가와 목사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가가와 목사의 가난했던 소년 시절, 폐병과의 투쟁으로 점철된 그의 청년 시절,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 가난한 자와 함께 살려한 그의 이념, 그리고 웅변가로도 유명했던 가가와 목사는 광은 소년에게 생의 한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황광은 목사는 가가와 목사와 유사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불우했던 소년 시절이 그렇고, 심장병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점이 그러하며, 사회 복지를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한 점이 그렇고, 심지어 예술관까지도 두 사람은 같았다. 즉, 예술은 인생에게 신앙을 주고 행복을 주어야 한다는 면까지 같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가가와 목사가 현실 참여(앙가지망)적인 관점에서 ‘사선을 넘어서’를 쓴 것처럼 황광은 목사는 훗날 수많은 동화를 쓰면서 어디까지나 구연(口演)동화 곧 글로 써서가 아니라 말로 해서 어린이들에게 흥미와 재미 및 교훈을 줄 수 있는 동화만이 생명을 가지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황광은 목사가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에 그 당시 예술동화의 제일인자로 꼽던 강소천(姜小泉) 씨와 예술동화냐 아니면 구연동화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던 일은 유명한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어쨌든 동화에 대한 황 목사의 관점 또한 가가와 목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은 소년은 가가와나 무찌무라 등 일본 사상가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평생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20세기 초 르네상스적 만능의 사람으로서 아프리카 오고웨강 근방 람바네레로 가서 의료 선교를 하며 ‘생명의 존엄’을 주장한 슈바이처 박사의 영향도 많이 받고 있었다. 황 목사가 신학교 시절에 절친했던 친구 중 한 명인 이일선(李一善) 목사가 훗날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그 밑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것으로 미뤄보아도 광은 소년이 슈바이처의 사상에 심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가늠할 수 있다.
황광은 목사의 ‘생명의 존엄’에 대한 사상에 대해서는 그의 동생 정은 씨가 전하는 다음 에피소드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루는 마을 아이들과 우리 집 옆에 있는 텃밭과 뒷집 사이를 경계짓는 싸리나무 울타리 옆에다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쳐놓았다. 그 당시 그 그물을 일본말로 ‘가스미아미’라고 했다.
참새들은 싸리나무 울타리에 앉으려고 날아오다 그물에 잘도 걸렸다. 우리들은 그물에 잡힌 참새를 떼어내어 땅에 힘껏 메쳐서 죽인 후 털을 뽑고는 숯불에 구워 먹었다. 구운 참새 고기의 맛은 기가 막혔다.
마침 참새 세 마리가 한꺼번에 그물에 걸렸다. 우리는 신이 나서 그물에 걸린 참새를 떼어내었다. 그때 광은 형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얘들아, 그 새를 죽이지 말고 나한테 팔아라. 한 마리에 5전씩 주마’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개구쟁이들은 이미 10여 마리의 참새를 잡아 고기맛을 맛본 터였다. 그리고 그 당시 5전이면 중국집에서 커다란 호떡을 한 개 살 수 있었다.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두말없이 15전을 받고 참새 세 마리를 광은 형님에게 넘겨주었다. 형님은 그 참새들을 받아서 하늘 높이 날려보냈다.
우리는 재미나서 계속해서 참새를 잡아 광은 형님에게 넘겼다. 그러면 형님은 한 마리에 5전씩 쳐서 그 참새를 받아가지고는 말없이 하늘로 날려보내는 것이었다. 10여 마리를 잡아 팔고 날려보내고 했다. 그때쯤 광은 형님의 호주머니가 바닥이 난 모양이었다.
돈이 바닥난 광은 소년은 자기보다 어린 꼬마들을 한데 모았다. 그는 꼬마들에게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꼬마들의 관심이 광은 소년에게 집중되자 그는 유창한 말솜씨로 실감있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