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길] 정의가 은혜와 연결되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 (3)  “정의는 은혜를 통해서만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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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정의가 필요합니다.

그리스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이 쓴 많은 책 가운데『키로파에디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자로서 왕자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정의에 관한 철저한 교육을 받은 고레스는 충분히 재판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이 들자, 실습하는 차원에서 작은 사건에 대한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몸집이 작은데 큰 옷을 입고 있는 아이와, 몸집이 큰데 작은 옷을 입고 있는 아이 사이의 다툼에 관한 재판입니다. 몸집이 크고 작은 옷을 입은 아이가 몸집이 작은 아이가 입고 있는 큰 옷을 힘으로 빼앗아서 자기가 입고, 몸집이 작은 아이에게는 자기가 입고 있는 작은 옷을 입으라고 준 것입니다. 이 일을 당한 작은 아이가 불의하다고 재판을 요청한 것입니다. 

고레스는 결과적으로 각자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었으면 정의로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몸집이 큰 사람의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렇게 판결한 다음 고레스는 정의를 가르친 교사들에게 아프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고레스의 판결은 왜 불의하고 잘못된 것일까요? 아무리 결과가 정의롭더라도 과정과 절차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큰 옷을 입고 있는 작은 사람의 권리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강제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정의에 대해 판단하기 전에 고레스는 더 깊은 정의를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책에서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저도 감탄했습니다. 정의는 사람의 깊은 마음과 연결된 것입니다. 사람의 깊은 영혼과 마음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정의가 흘러야 합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을 구약 아모스서는 정의는 물처럼 흘러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 물을 생각하면 정의를 물처럼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물은 평화롭고 조용하고 온유하게 흐릅니다. 항상 낮은 곳을 찾아서 겸손하게 흐릅니다. 막히면 돌아갈 줄 압니다. 더러운 구정물도 넉넉히 밭아주고 자기를 더럽혀서 세상을 깨끗하게 해줍니다. 어떤 그릇에도 맞추어서 담길 줄 압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거룩하게 지킵니다. 물은 바위도 뚫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장엄한 폭포처럼 자기를 용감하게 던집니다. 마침내 물은 유유히 흘러서 넓은 강이 되고 마침내 넓은 바다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정의를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가 은혜를 통해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의는 칼처럼 무섭고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아닙니다. 이편저편이나 적폐청산을 위한 갈라치기가 진정한 정의는 아닙니다. 진정한 정의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포용적입니다. 신학자 미하일 볼프 교수는 “정의는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은혜와 연결된 정의만이 정의다운 정의가 될 수 있다.” 목회현장에서 저는 이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깨닫습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은혜의 물이 흐르기를 소망합니다. 

장창진 목사

<참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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