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 예수를 잘 믿는 자세

Google+ LinkedIn Katalk +

조선에 가톨릭 포교가 시작된 때가 2백년이 넘었지만 그 당시의 쇄국정치 때문에 전도가 어려웠고, 그로부터 백년 후에 개신교가 들어올 때도 조건이 그리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여 어려운 처지에 부딪쳐보면서, 오히려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이때에 미국을 비롯한 나라들이 우리를 도우면서 선교를 함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기독교가 가장 빨리 전파된 나라가 되었고, 이제는 선교를 받았던 나라에서 선교를 하는 나라로 변모하면서,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당연히 우리의 현대사에서 교회가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였고 따라서 교회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을 벗어나 우리의 생활에 끼친 영향력이 대단하였다. 그러면서 교인이 많이 늘어나고 교세가 확장되면서 순기능도 많이 있었지만 때로는 역기능도 보여줌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책임은 순전히 예수를 믿는 우리 신자들의 몫이 되고 있다. 

나는 신앙심이 깊은 부모님을 두었기에 일생을 당연한 신앙인으로 살아왔고, 나의 생활기반이 교회와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42살에 장로장립을 받고 일생을 교회와 연결된 생활을 하였고, 이제는 은퇴장로로서 여생을 보내면서 살아가고 있다. 주지하는 대로 코로나사태가 발생하면서 교회생활에 많은 제약이 생겨 주일에 겨우 교회에 출석하는 형편이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길 뿐이다. 그러면서도 교회에 가면 예배를 드리는 감격과 은혜가 예전보다 더 깊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고 교회에서 교우들을 만나면 다정하게 ‘장로님, 안녕하세요’하면서 따뜻한 정을 느끼지만, 때로는 ‘내가 이렇게 대접 받을 정도의 모범적인 신앙인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생기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과연 나는 예수를 정말 제대로 확실히 믿고, 올바른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 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을 살만큼 살았으니,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이라는 뜻을 되살펴보는 생활을 해야겠다고 여겨진다. 이는 곧 초대교회에서의 생활로 돌아가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기에 때로는 혹시 나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그저 성전의 뜰만 밟는 자세로 보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런 마음이 생기면서도 내 자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의 말씀을 믿고 행하면 될 것이라는 다짐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싶다.

하나님을 잘 믿는 자세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이런 자세를 ‘욥의 믿음’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에는 감사할 수 있지만, 어려운 일을 당하는 역경에서는 감히 ‘감사’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의 시험 대상이었던 욥은, 정말 지옥 같은 처지에까지 떨어지는 곤욕을 당했지만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끝까지 그의 믿음을 지켰기에 결국에는 커다란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하는 결과를 배워 알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제목을 찾아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신앙인의 자세를 유지함이 필요하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