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정복의 꿈을 꾸던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 2세(Philip II)가 기원전 336년에 자신의 경호원 파우사니아스(Pausanias)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알렉산더는 부왕의 갑작스러운 변고로 20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그의 즉위에 대한 반대세력의 극복과 부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기원전 334년에 마케도니아군과 헬라스 연맹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그는 인도의 간다라(Gandhara) 지방까지 원정했다가 페르시아의 수사로 돌아왔다. 정복지 페르시아에서 군인들 중 80명의 고관과 1만 명의 장교를 뽑아 페르시아 여성과 결혼식을 거행하게 하고, 자신도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Darius III)의 딸 스타테이라(Stateira)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것은 그의 동서융합과 피정복민과의 화합정책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미전쟁(1455~1485)은 백년전쟁에서 프랑스한테 패배한 잉글랜드 왕국이 왕위계승을 놓고 요크(York) 가문과 랭커스터(Lancaster) 가문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다. 장미전쟁의 주역인 두 가문 사람들은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들이며, 에드워드 3세의 3남인 랭커스터 공작이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이고, 4남 요크 공작이 요크 가문의 시조이다. 플랜태저넷(Plantagenet) 왕조의 마지막 왕 리처드 2세가 왕위를 빼앗기고 후사가 없이 사망한 후 랭커스터 가문에서 헨리 4세-헨리 5세-헨리 6세가 왕위에 올랐고, 이후 이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요크 가문에서 에드워드 4세-에드워드 5세-리처드 3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며, 마지막으로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에 속한 헨리 튜더(Henry Tudor)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튜더 왕조가 시작된다. 장미전쟁은 헨리 6세의 왕위를 에드워드 4세가 찬탈하면서 시작되고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꺾고 왕위에 오르면서 끝난다. 오락가락했던 왕위는 결국 랭커스터 가문으로 옮겨갔는데, 헨리 튜더는 두 번 다시 전쟁을 겪지 않으려고 요크 가문의 여인이자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두 가문의 화합을 확고하게 해 전쟁의 막을 내렸다.
15세기 말에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도들의 ‘재정복(Reconquista)’을 통하여 성립된 아라곤(Aragon), 카스틸라(Castilla), 포르투갈(Portugal)의 기독교 3왕국이 그라나다(Granada)의 무어인(Moors) 이슬람 국가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는 가운데 도시경제가 지속적으로 발달하고 신분제 의회인 코르테즈(Cortes)도 발전하였다. 그러나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이베리아 반도의 국왕들은 효율적인 중앙정부의 수립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이베리아 반도의 정세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Ferdinand)와 카스틸라의 이사벨라(Isabella)의 결혼이었으며(1469), 두 사람이 잇달아 왕위에 오름으로써, 통합된 에스파니아 왕국이 탄생되었다. 에스파니아는 이슬람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를 공격해서 이를 병합하였다(1492). 결국 15세기 말에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여 신항로와 신대륙 발견에 앞장서,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를 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가야와 신라, 백제와 신라 간에, 특히 고려시대 왕건이 결혼을 통한 호족통합정책을 시도한 바도 있었다. 한반도는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분단된 지 77년이 경과했다. 남‧북한은 6‧25동란을 비롯한 크고 작은 비극으로 점철되어 왔다. 북한은 핵무기로 공포정치를 멈추지 않고 있으며, 한반도 주변 4강의 냉전이 언제 종식될지 모른다. 만일 한반도에서 6‧25동란과 같은 전쟁이 재발한다면, 공멸의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전쟁보다 강하다. 사랑은 장벽과 국경을 넘어 통합의 원동력이다. 남‧북한 동포들이 진정 지난날의 미움과 적대를 넘어 인간의 순수한 본질적 사랑의 발로로 하나되어 미래로 웅비한다면, 통일된 코리아(Korea)는 세계에 더욱 우뚝선 자랑스러운 희망의 나라가 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