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의도적으로 서양영화 상영관을 찾아다니며 영화구경을 하던 때가 있었다. 영문학 전공이라는 알량한 자존심과 명분을 염두에 두고 영어회화도 배우고 영어청취능력도 향상시키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그때 본 서양 영화중에 영화의 제목과 주연 배우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영화중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한 장면이 생각난다.
어느 무도회장(舞蹈會場)에서였다. 20대의 발랄하고 아름다운 여성과 40대의 중후한 인품의 남성이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이 두 남녀는 서로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대화를 하고 있다. 춤을 추면서 남성이 낮은 목소리로 여성에게 묻는다.
“실례지만 아가씨는 나이가 몇이슈?(Excuse me, but how old are you?)” “저는 갓 스물입니다(I’m just out of my teens.)” “아가씨는 서른 살쯤 돼 보여요.(You look around thirty.)” 이번에는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남성에게 묻는다.
“선생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How old are you, sir?)” “나는 마흔이에요(I’m forty.)” “선생님은 서른 살쯤 돼 보여요(You look about thirty.)” 여성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남자는 의미있는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사실상 우리가 동갑내기로군요(Actually, we are of an age.)”
영화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가 매우 인상적인 것은 두 남녀간의 ‘20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한 순간에 ‘동갑내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20년이라는 긴 시간적 차이를 뛰어넘어 삽시간에 같은 연배의 연인이 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대목이다. 한국적인 문화에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면 아마도 오해가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20세의 아가씨를 향하여 30세로 보인다고 하면 아가씨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인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을 것이고 40세의 남성을 30세로 본다는 말은 자칫 ‘나이 값도 못하는 사람, 곧 철이 없어 보인다거나 경망스러워 보인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 영화를 보면서 두 남녀의 대화와 표정에서 받은 느낌은 ‘남자주인공’은 ‘10년 정도나 젊게, 건강해 보인다’는 뜻으로, 그리고 ‘여성주인공’은 ‘10년이나 어른스럽게, 성숙해 보인다’는 뜻으로 이해했기에 두 사람의 대화가 매우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서양의 극명(克明)한 ‘문화적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세대(世代)’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동일한 문화권에서 비슷한 시기에 출생해서 역사적 문화적 경험을 공유하고 비슷한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을 갖는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되어 있다. 각 세대 간에는 의식의 차이를 보이게 마련인데, 전문가들의 설명에 의하면 어린 시절의 경험과 인상이 ‘경험목록’의 제일 아래쪽에 자리잡고, 그 이후의 경험들이 순서에 따라 그 위에 쌓인다고 한다. 그런데 경험들이 시간 순서에 따라 그냥 쌓이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경험과의 관련을 통해 통합되면서 개인의 의식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대 차이’를 말할 때, ‘나이의 차이’나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된 ‘인식의 차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당연시하기 쉽다. 그러나 단순한 인식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인식의 차이가 말과 행동으로 표출될 때, ‘세대갈등’이 야기(惹起)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표현하셨다. 하나님은 여러 세대의 하나님이시다. 또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나 엘리야를 이은 엘리사는 모두 성공적인 신앙의 계승세대이다. 사도 바울도 신앙의 계승을 언급하면서, “디모데의 믿음의 뿌리”를 “외조모 로이스 → 어머니 유니게 → 디모데”에 이르는 3대의 신앙을 아름다운 모델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뜻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계속되어 발전하고 성취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세대 차이》는 결코 갈등의 요인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