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내게 부목사가 되라하신 장경재 목사님

Google+ LinkedIn Katalk +

나는 교편 8년만에 18평짜리 단독주택 내집을 서울 변두리 화곡동에 마련했다. 나가던 교회도 아현동 산칠교회에서 화곡본동 46-228번지 합신측 화성교회로 옮겼다.

어느날 장경재 목사님은 교회에서 느닷없이 “오집사 내 밑에 부목사가 되시오. 신학공부는 내가 시켜 드리겠소” 이렇게 말씀하셨다. 좀 당황한 나는 “저는 소명감이 없어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교수가 되어 평신도로 열심히 도와 드리겠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대답해 드렸다. 그 뒤로 더 이상 부목사가 되라는 말씀은 없으셨다. 나는 은혜 넘치는 장경재 목사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장 목사님은 장제억 유재신 부모님 밑에 4남 3녀 중에 넷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미신을 믿던 어머님이 주님 은혜로 교회 종소리 듣고 스스로 교인이 되시어 죽을 병에 걸린 남편을 살려내며 예수를 믿게 하고 가산이 기울던 가정이 만주로 이사 가서도 어머님 믿음은 독실했다. 21세가 되도록 예수를 모르고 사는 막내아들 장경재를 데리고 교회를 가시다가 갈림길에서 “경재야 너는 오늘도 에미 따라 예배당 안 가고 공군부대로 일 가느냐”는 사랑의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 어서 돈 많이 벌어서 고향 의주 가서 잘 살아요.” 이렇게 대답한 장경재는 예배당으로 안 가고 공군부대로 갔다. 어머님 전도를 물리치고 공군부대로 간 장경재는 일 마치고 나오다 공군 보초헌병에게 암호를 셔츠에 소지한 채 정문을 나오다 걸렸다. 간첩 혐의자로 총살감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 갇힌 장경재는 갈림길에서 예배당으로 가자하신 어머님 모습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매달려 눈물바다를 이루며 기도했다. 감옥 밖에 똥 푸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 살려만 주시면 한평생 공군부대 똥은 제가 퍼서 변소 청소를 잘 하겠습니다.”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공군부대 변소바닥 오줌이 한강물로 넘칠 때 아침 일찍 출근한 장경재 군속이 혼자서 깨끗이 변소청소한 일이 있다. 

이 기특한 모범적 행동을 잘 지켜 봤던 일본군 상이용사 소령출신 과장이 “장경재 군속은 순간적 실수지 결코 간첩행위를 할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완강한 말로 공군부대 당국에 장경재 신변을 보호해줘서 하나님은 장경재 기도대로 살려 주셨다. 어머님 기도로 기독교 신자가 된 장경재는 교회 집사가 되어 만주 봉천(현 심양) 시청 직원이 되어 과장 다나까에게 이야기해 벽돌 물자를 얻어내고 서탑교회 건축에 앞장섰다. 서탑교회 여자청년 강정채와 결혼도 했다. 아들만 다섯 낳았다. 만주 봉천신학교에서부터 평생 은사로 모신 박윤선 교수를 만나 그때부터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 3대 교육이념을 잘 배웠다. 

광복 후 전도사가 된 장경재 부부가 주일날 김일성 투표를 반대하다가 핍박이 심해 자유 찾아 1947년 8월에 월남했다. 부산고려신학교에서 다시 만난 박윤선 목사님 제자로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으며 마산문창교회 목사시무를 중심으로 진해, 부산, 마산, 밀양 등지에 목회를 하다가 1964년도에 상경해 용산 갈월동에 세운 성광교회 담임목사로 4년 시무하고 김성실 권사가 두부장사로 모은돈 380만 원으로 함께 1967년 9월에 화곡본동 46-228번지에 화성교회를 세워 34년간 기초를 잘 다져 주시고 2001년도 3월 2일 83세로 하늘나라 가셨다. 스승 박윤선 목사님이 세운 수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땀을 많이 쏟으셨다. 나는 부목사가 되어달라 권면하신 장경재 목사님 말씀에 감사하며 봉천체험 중심 장목사님 설교에 항상 감동 깊이 받았다. 장 목사님 손으로 안수받으며 안수집사 장로로 임직되어 신앙의 아버지로 모신 장경재 목사님을 열심히 잘 도와드렸다. 목사 장로 안수집사가 된 장목사님 다섯 아들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존경하는 장경재 목사님 내 가슴에 늘 그립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