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신앙을 보는 눈이 바뀌어 간 이승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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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재학당 입학 전 신앙관 – 신앙도 동양의 것, 문명도 동양의 것

1895년 4월 20세의 청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문을 두드렸다. 친구 신흥우의 형 신긍우가 권유해왔다. 또 정부에서도 서양학문을 배우라 권면하던 차였다. 이승만 등 당시 조선의 청년들은 과거 급제를 통해서 출세와 지위 상승을 노려왔는데 일본과 개화파가 중심이 된 갑오개혁 때 이 과거제가 갑자기 폐지된 것이다.

예전에는 배재학당에 다니는 친구들이 자기들인 배운 서양문물에 대해 말을 걸어오면 으레 친구들을 ‘배신자’로 취급하면서 ‘나는 내 어머니의 종교[불교]를 버리지 않겠다’ 장담하던 이승만이었다. 이때 이승만의 사상은 이른 바 동도동기였다. 도(道) 즉 신앙도 동양의 것, 기(器) 즉 문명도 동양의 것이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승만은 현실에서는 유교가, 이상세계에서는 불교가 힘을 쓴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유교와 불교의 조화가 그의 신앙관이었다. 그런데 유교와 불교는 둘 다 동양의 종교이다. 그래서 서양문물을 자랑하는 친구들에게 동양 종교를 따르는 자신은 문명도 동양의 것을 고수함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동도동기(신앙도 동양의 것, 문명도 동양의 것)는 당시 조선에서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는 위정척사파의 입장에 통하고 있다. 쇄국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나라 문을 굳게 걸어 닫고 신앙도, 문명도, 동양 전통의 것을 고수한다는 입장이었다. 

2. 배재학당 시절 신앙관 – 신앙은 동양의 것, 문명은 서양의 것

그러던 이승만이 과거제 폐지 후에 영어를 배워볼까 해서 배재학당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으면서 근 3개월 실명 상태에 있다가 서양의학을 배운 일본인 의사가 지어준 물약으로 다시 보게 된 경험이 이승만의 배재학당 입당에 적극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이 물약은 이승만이 처음 경험한 소위 서양문물이었는데, 3개월간 앞을 못 보고 지내다가 이 물약을 쓰면서 다시 보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

배재학당은 최초의 감리교 내한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였다. 선교사가 세운 미션계 학교에 당연히 채플이 있었다. 이승만이 예배에서 들은 1천9백 년 전에 자기를 위해 죽었다는 예수 이야기가 너무도 허무맹랑했다. 어머니가 놀라실까 하여 입학도 숨긴 이승만이었지만 이승만은 이제 이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기독교 신앙을 자기와 같은 유학자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때 어머니에게 배재학당 입학 사실을 털어놓을 정도로 만만했다. 친구들처럼 자기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영어와 같은 서양문명만을 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즉 신앙은 동양의 것, 문명은 서양의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를 동도서기라고 하는데 당시 조선에서 개화를 추구했던 세력들이 견지했던 대표적 입장이었다. 개화파라고 불린 이 사람들 대부분은 서양문명을 조선보다 먼저 받아들인 일본을 선망했다.

류금주 목사

<전 서울장신 교수·현 청교도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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