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허영숙은 의사와 환자로 마주해야 하는데, 자신의 감정이 그렇지를 못하고 일방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 생각되지만, 자신의 생각이 마음 먹은대로 컨트롤 되지 않아,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춘원은 안주머니에서 하얀 돈봉투를 꺼내 허영숙에게 내밀었다. “선생님, 지난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거 받아 주십시오.” “아뇨.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같은 조선인 아닙니까? 서로 도와야지요.”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 받으세요.”
춘원은 돈 봉투를 탁자 위 여인 앞으로 내밀었다. “각혈은 언제부터 했나요?” 허영숙은 의사로서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3주 전부터.” “치료는 곧장 했겠지요?” “아뇨. 치료는 지난주부터 했어요.” “안돼요. 이 병은 곧장, 꾸준히 치료 안하면 안되는 병입니다. 열심히 병원에 다녀야 합니다. 알겠죠?”
허영숙은 어머니가 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이광수는 이 말에 그저 잔잔한 미소만 지어 보이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친절한 모습을 보이는 수련의, 조선의 이 아름다운 여자를 춘원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음 병원 내방은 언제입니까?” 허영숙의 물음에 춘원은 주머니에서 치료 안내증을 꺼내 살펴보더니 “다음 주 오늘이네요.” 이렇게 말하면서 춘원은 머리를 숙여, 오늘도 감사의 마음으로 목례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제 허 선생님은 나의 평생 주치의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일본에 와서 가장 먼저 나를 도운 분이니까요. 경설에 가서도. 아무튼 잘 부탁합니다.” 너스레를 떨며 이때 한 말이, 평생 이광수의 개인 주치의가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의 말은 씨가 된다는 말은 결코 허황된 말이 아닌 것 같다. 허영숙은 춘원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오늘 두 번째 보는 그였지만, 오래 전부터 잘 아는 다정한 사이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나를 좀 도와 주시오’라는 간절함 같은 것이 있어 보였다. 허영숙은 이광수에 대해 이성적인 연인보다는 일종의 모성애 같은 느낌을 받으며 이광수를 마음에 품었다.
춘원 역시 그럴 것이다. 어릴적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처럼 외롭게 자란 춘원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초월하는 그 어떤 모성애로, 여성의 보호 본능의 애틋한 마음에서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을 것이다. “나 다다음주 초에는 이곳을 떠나 경성으로 귀국해요. 떠나기 전에 우리 한번 밥이나 먹어요.”
허영숙은 당초 마음에 없었던 말을 꺼내 정식으로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춘원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간단히 동의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무정’의 애독자인걸 아세요? 글을 어쩜 그렇게 잘 쓰세요? 나도 전에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나는 잘 안돼요. 한 줄도 제대로 못쓰니 참 한심한 여자죠?”
자기와 함께 식사를 하자는데 선뜻 동의해 준 춘원이 고마워 허영숙은 지금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이날 두 사람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이렇게 헤어졌다.
허영숙이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친구 씨즈코는 무슨 일인지 먼저 퇴근하고 자리에 없었다. 허영숙 책상위에 노란 쪽지를 남긴채. 쪽지에는 예쁜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잘 해 보라구. 무척 부럽다. 숙이 아니면 내가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는데. 한발 늦었구나. 나도 춘원을 무척 좋아하는데. 축하를 보낸다. 씨즈코가.’
허영숙의 얼굴에 갑자기 승자만이 가지는 득의의 환한 미소가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