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신앙산책’에서는 현대인의 교양상식으로 스포츠용어 한 가지를 설명해 드리고자 한다. 오늘의 주제는 “벤치 클리어링(bench-clearing)”이다. 이 용어는 주로 야구 같은 단체경기에서 양 팀의 선수들이 “벤치(bench)를 텅 비워놓고(clearing) 달려 나가서 몸싸움을 벌이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경기 중에 양 팀 선수 사이에 신경전이나 과격한 행동이 벌어질 때, 벤치에 있는 모든 선수가 자기 팀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뛰쳐나오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몸싸움이 일어날 때는 양 팀의 벤치에 있는 선수들은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달려가서 몸싸움을 말리거나 화해시키는 것이 상례(常例)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에는 벤치 클리어링[이하 “벤클”]이 난투극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으나 한국의 경우는 실제로 난투극이 벌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일과성(一過性)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야구 경기 중에서 고의가 아니더라도 투수가 ‘빈볼(bean ball)’을 던지는 경우가 더러 발생한다. ‘빈볼’이란 ‘빈(bean)’은 영어로 ‘콩[豆]’을 뜻하는데 미국에서는 ‘사람의 머리’를 가리키는 은어(隱語)로 사용되므로 “투수가 타자를 위협하기 위한 목적으로 타자의 머리를 향해 던지는 투구(投球)”를 말한다. 야구 경기에서는 ‘벤클’이 일어나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경향이 있다. ‘벤클’이 일어나는 이유는 상대에 대한 보복이나 사고를 억제하고 예방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즉 ‘벤클’이 ‘빈볼’ 등의 반칙 행위에 대한 경고로 작용하여 투수 역시 함부로 빈볼을 던지지 못하도록 조심하게 된다는 점이다.
축구나 농구가 동적(動的)인 운동이라면 야구는 정적(靜的)인 운동이므로 단조로운 야구경기를 관전하는 팬들에게 ‘벤클’은 흥미거리나 볼거리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 ‘벤클’은 보는 시각이나 관점에 따라서 ‘집단 이기주의’라고 지탄을 받을 수도 있지만 선수들 입장에서는 ‘벤클’이 발생하면 동료간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지는 이점(利點)도 있게 마련이다. 미국 프로야구의 경우, ‘벤클’이 발생하면 해설자들은 경기를 중계할 때보다 더 흥분하고, 관중들도 일어나서 환호한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벤클’을 절대로 비난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不文律)이다.
야구에는 ‘벤클’에 대한 처벌규정이 있으나 보통은 화해로 끝나고 심한 경우라도 난투극이 되어 부상 선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1~3개 경기 출전정지가 고작이라고 한다. 오히려 미국의 경우에는 ‘벤클’에 적극 동참하지 않는 선수에게 벌금을 물리는 팀의 내규(內規)가 있다고 한다. ‘벤클’이 발생하면 멀리 불펜에 있던 선수들도 전력 질주하여 ‘벤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바로 이 내규 때문이다. 벌금도 이유가 되겠지만 참여에 소극적이면 팀과 동료를 생각하지 않는 선수로 팀에서 낙인이 찍힐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9월 2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는 롯데와 LG의 경기 중, ‘벤클’이 벌어졌었다. 사건의 전말(顚末)은 이러하다. 8회 말이 끝나고 나서 그때까지 볼을 던지던 롯데 투수 구승민(33세) 선수가 LG 문보경(23세) 선수에게 자신의 싸인(sign)을 훔쳐보지 말라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을 건네자 이를 본 LG팀의 선배 김현수(35세) 선수가 롯데 구승민 선수에게 달려가 불쾌한 얼굴로 격하게 항의하면서 운동장에 있던 선수들과 불펜에 있던 양 팀 선수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와 사단(事端)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당일 싸인을 훔쳐본 것으로 의심을 받았던 LG의 문보경 선수는 롯데의 구승민 선수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몰랐다고 했다. 다음 순간, 롯데의 구승민 선수는 자신의 오해임을 확인하고 나이가 두 살 더 많은 LG 김현수 선수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면서 모든 일은 없었던 일이 되었고 관중들에게는 재미있는 볼거리 이벤트가 된 셈이었다.
그날 TV로 중계를 지켜보던 나는 세상이 잘 모르는 혼자만의 비밀스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속으로 빙긋이 웃고 있었다. 내용인즉슨, 김현수 선수는 내가 젊은 시절 교편을 잡았던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출신 선수인데 그날 오해를 받았던 문보경 선수는 김현수 선수의 신일고 12년 후배였다. 김현수 선수가 막내둥이 띠 동갑 후배가 난처한 상황에 처한 모습을 보자마자 그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쏜살같이 구승민 선수에게 달려가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구나!”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