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발언대] 백마고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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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원로장로회(회장 유호귀 장로)는 가을 문화탐방을 강원도철원군 백마고지에서 가졌다.

고석정(임꺽정이 도피한 곳)에 도착해 인근에 소재한 향원교회(김석범 목사)에서 도착 예배를 드렸다. 이어 철원 노동당사(등록문화재 제22호)를 찾았다. 이 건물은 1945년 8월 15일 해방후 북한이 공산 독재정권 강화와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고 6.25전쟁 전까지 사용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바깥쪽 사면 벽면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데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철골 지지대로 받치고 있었다. 

현재 철도는 백마고지역까지 갈수 있고 거기서 4km를 달려서 백마고지를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언덕에 백마고지 전적비와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기간 중 가장 치열하게 고지 쟁탈전을 전개했던 1952년 10월 이곳 철원에 위치한 작은 고지를 놓고 국군 보병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이 전력을 기울여 쟁탈전을 벌인 끝에 제9사단이 승리한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 동안 불과 395m 밖에 되지 않는 고지를 빼앗기 위해 혈전을 벌이는 사이, 중공군 1만여 명이 전사상 또는 포로가 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발사된 포탄 수는 아군이 21만9,954발, 적군이 5만5,000발 총 27만4,954발이었으며, 12차례의 공방전으로 철원, 평강, 금화를 잇는 중부전선 일대의 적 병참선을 차단, 확보해야 한다는 작전상의 이유뿐만 아니라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양국가의 명예를 건 일전으로 변해 더욱 처절한 싸움이 전개 되었다고 했다.

결국 세계 전쟁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처절한 포격전, 수류탄전, 백병전을 10일 동안 주야간 반복한 끝에 이 고지를 아군이 차지했는데 그 후 이곳에는 백마고지를 빼앗긴 김일성이 3일 동안 애통해하며 식음을 전폐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백마고지 명칭의 유래는 작전 기간 중 포격에 의해 수목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후의 형상이 누워 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에 백마고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중공군의 공세를 결사적으로 분쇄한 한국 보병 제9사단은 그 용맹을 세계에 떨치게 되었고 부대 애칭도 백마부대라고 부르고 있다.

6.25전쟁은(50. 6. 25~53. 7. 27) 낙동강 전투와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것과 백마고지에서 짧은 기간 동안 밤과 낮 계속된 전투에서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것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일행은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비무장 지대에 있는 넓은 들판을 바라보면서 그곳을 출발해 동두천을 경유해 2시간을 달려서 출발장소에 도착해 고향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류춘영 장로

<오류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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