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 다시 하는 종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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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는 역사적인 사건은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비텐 베르그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 시작되었다. 당시에 교황을 정점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지녔던 로마 가톨릭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패했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세속의 법규에도 어긋나는 범죄를 짓는 바람에 수많은 신앙인들의 저항을 받으면서 개혁의 필요성이 요구되었기에 스위스의 칼뱅이나 즈빙그리 같은 신학자들이나 그 이름을 모두 열거하기 어려운 많은 사제들이 저항과 개혁의 기치를 내세웠으나, 마침내 루터의 개혁 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거의 신적인 권한을 지닌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광대한 교회 세력에 의해 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지니게 되었다. 이때에 루터는 그동안 히브리어로 되었고, 일반인에게 보급되지 못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때마침 발명되었던 인쇄술에 의해 책으로 엮어져 보급된 성경을 앞세워 새로운 신앙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일부 사제에게만 허락되었던 성경이 일반 성도에게도 전파됨으로 이를 기준으로 새로운 신앙의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랜 기간 기존의 가톨릭교의 위세에 눌렸던 교회는, 점점 판세가 바뀌면서 기독교는 이제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양대 종교로 성장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종교적인 압박을 받던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 이주해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고, 선교에 힘쓴 덕분에 이제는 기독교가 천주교를 앞서는 형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때에 포르투갈 신부가 입국했었고, 그 후에 한국 천주교는 천주교회가 창설된 해를 1784년으로 정하고 있다. 그리고 100년 후인 1885년에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가 인천을 통해 입국했다. 그러다가 6·25동란은 우리의 교세를 크게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고통과 시련의 기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때에 미국을 비롯한 우방들의 도움은 그대로 전도와 연결되어,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크게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선교를 받았던 나라에서 선교를 하는 나라로 변모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견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물론 이에는 모든 교회가 열심히 교회를 부흥시키는 순기능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외적인 성장에 치중하다보니, 여기에서 발생하는 부작용도 있음이 사실이다. 너무 외적인 성장을 위해 교회는 점점 거대해지면서, 당연하게 이에 따른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외적으로 커지면서 우리의 병폐인 분당이 많이 생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권력화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현실적으로 지금 교회가 나쁜 일에 앞장선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만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항상 어떤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막는 것을 생각하고 처신에 신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숙된 신앙의 자세를 생각하고, 어떤 자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를 바라보는 비신자에게 손가락질을 받기 전에 조신한 몸가짐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며 항상 새로운 종교 개혁을 하는 신앙의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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