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성가의 아버지 유재헌 목사
유재헌 목사는 선교사 원두우 목사가 1885년 설립한 경신학교를 거쳐 피어선성경학교를 다니던 중 1926년 6.10만세 시위에 가담하고 그후 피어선성경학교 지하실에서 배재고보 협성학교 학생들과 YMCA 김동석 등과 재차 만세운동을 위해 모의, 16일에는 거리에 뿌릴 독립문서를 등사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6월 30일 풀려나왔다. 그후 경기도 용인의 동아일보 지구에 기자로 일하면서 ‘감성회’라는 민족계몽운동 단체를 조직, 독립운동을 꾀하게 된다. 일경의 감시와 핍박을 피해 현해탄을 건너가 구두수선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고베의 관서성서신학교를 마치고 1931년 12월 25일 미가와지마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도쿄 고베 요코하마 아카시 등지에 ‘조선 기독교 독립교회’를 세우고 노방전도에 힘쓰던 중 수차 투옥 감금되어 고난을 당했다.
14년 동안 교회를 개척하던 중 1941년에 옥고를 치르고 1942년 강제송환 귀국, 40일 금식 후 부흥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집회했다. 유 목사는 1945년 최초 개신교 수도원인 ‘대한수도원’을 철원에, 1950년 ‘임마누엘 수도원’을 서울 삼각산에 세워 영계의 발전소로 삼았다.
사람을 움직이기 전에 전도운동을 먼저 전개했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성신받고 다음에 나가 외치고 건국하자”를 슬로건으로 선교와 독립운동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믿고 선언했다.
6.25 전에 이미 이북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피난 와서 유재헌 목사의 집회에 참석, 6.25발발 2주 후 7월 9일 “나는 마음을 정하였다”고 고백하고 7월 11일 ‘순교자의 깃발’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살을 찢어가라’는 복음성가를 불렀다. 1950년 8월 15일 정치보위부의 급습으로 서대문형무소 지하실에 감금, 고문당하다가 9.28 수복 전 납북되어 가던 중 총살당해 순교했다.
이 내용은 작고하신 찬송가연구가 오소운 목사님께서 쓰신 글이다.
김종희 목사
경신 중ㆍ고 전 교목실장
전 서울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