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으로 훈련받던 무렵 ②
아동용 <주일학생> 잡지도 창간
신학생 시절부터 명설교가로 명성
동화작가지만 문협 뒤에서 돕기만
아동문학사에 이름없어 안타까워
그저 그런 육감으로 나는 녹십자란 이름이 탄생되지나 않았나 생각해 보았던 것인데, 졸업반 수학여행 때 계룡산에서 녹십자기를 보고, 또 다른 방향으로 우리의 생각이 커브를 틀었던 것을 여기서도 숨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형은 물론, 오늘 교계에서 쟁쟁하게 떠드는 위인들이 모두 어린애마냥 즐겁게 수학여행을 즐겼던 1948년 가을 어느 날, 조선신학원대학 졸업반이 부여를 지나 계룡산 신도안에 다달았을 때, 그 어느 초가집 마당 한 귀퉁이에 꽤 높은 대나무 막대 위에 녹십자기가 휘날리는 것이 아닌가? “야, 녹십자다. 녹십자야!” 동료들의 시선은 일제히 이 형과 나를 주시하게 되고, 우리는 우리대로 죽었던 녹십자가 되살아온 것 같아서 얼굴에 홍조마저 띄우게 됐는데,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통일교의 교리 같은 심령 통일에 만유신교 정도의 유사 종교였지만 어쩌다 만유의 종교를 하나로 만든 것이 녹십자로써 표현되느냐는 점에서 녹십자의 지명이 공신성이 되산 것 같아 다시 한번 녹십자를 살려야 한다는 만감이 우리들의 가슴에 오간 것 같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상경하자 이 형은 또다시 잡지를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주일학생>이라는 주일학교 잡지였기에 나는 또다시 손을 잡아줄 것을 약속했다. <녹십자>는 성인 상대였지만 <주일학생>은 아동용이기에 나는 내 성미에 맞는다고 해서 새로운 힘을 내었다고 생각된다. 비로소 내 이름도 인쇄인 난에 올려져 제법 잡지인이 된 것 같아 물불을 헤아리지 않았다.
새로 이연호 형이 표지를 맡고, 이보라 형이 편집에 관여해 주었다. 더구나, 주일학교 운동에 조예가 깊은 목사님들이 이만저만 격려가 아니고, 이 형을 두둔해 주던 이학응 장로님은 꽤 많은 재정을 원조해 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 무렵 우리는 <녹십자>에 대한 재건은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던 것은 또 다른 정의가 우리를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일제 시대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적극 지원한 단체에 ‘녹기연맹’이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친일 단체였고, 그 주재자가 일본인과 결혼을 했다던가, 창씨도 먼저 했을 뿐 아니라 하오리에 게다만 끌고 다녔다던가, 그런 걸 생각하면 녹색이 꼭 좋은 것만 같지 않다는 점을 들어 우리의 실패를 오히려 잘한 일로 자위하기도 했던 것이다.
<주일학생>도 두 번 이상은 더 나가지 못했다. 역시 그 책도 청색 글자에 녹색을 바탕으로 했던 표지가 잘못된 탓일까? 그 날은 바로 이 형의 약혼식 날이어서 나는 반지값을 마련하러 자전거를 달리고 있는 동안 이 형은 다다미방에서 장난감 반지가 눈에 띄어 그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던가. 잡지는 갔어도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고 그리고 결혼하고, 살고 또 모이고 헤어지고를 연속해 인생을 수놓으며 사십 고개를 넘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판매 자본이 문화 사업까지 지배하고, 수탈 문화가 원고료까지 긁어먹는 성숙한 시대에선 차라리 녹십자 시절이 얼마나 더 그리워지는지 모른다.
신학생 부흥 강사
신학생 시절의 황광은은 이미 명설교가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가 안동 지방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해 크게 성공을 거둔 사실에 대해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 석용원(石庸源)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삶과 믿음과 시의 고향’이라는 제목의 이 글 첫 부분에는 황광은과 직접 관계가 없는 부분도 있으나, 당시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 그 전문을 여기 옮긴다.
그 무렵 안동에는 기막힌 문학청년이 한 분 있었다. 안동기독청년 회장 김기한(金琪漢) 장로이다.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등사판 시집을 펴내기까지 한 정열파였다. 해방 전에는 사상가로 투옥되었고, 이상촌 건설에 발벗고 나선 바 있어서 안동 지방에서는 상당히 유명했다. 지금 시집 이름은 잊었으나 신앙 시집으로 기억된다.
물론 우리와는 나이 차이가 많아 안동교회 기독학생회를 지도하시는 위치였고, 나는 문학의 인연으로 잘 따르는 축이었다. 이 무렵 그를 따르는 중학생으로는 우리나라 교육심리학계의 제일인자 김재은(金在恩) 박사(전 이대교육대학원장)가 있다. 그는 나보다 안동 농림의 한 학년 아래 반이었다. 우리는 노트에 남의 시를 써가지고 외웠고, 자작시도 써서 돌려보았다. 아마도 경안(慶安) 지방 기독청년의 문화 활동의 기수는 김기한 장로였다. 우리는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석호인(石浩仁, 석용원의 형)은 어느 새 신학생이 되어 있었다. 정용철(鄭容澈)이 조선신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자연 매부인 석호인을 끌어들인 것이다.
겨울방학이 되었다. 고향 평은(平恩) 교회에는 색다른 부흥회가 열렸다. 목사를 초빙한 것이 아니라, 젊은 신학생 두 분이 와서 마을을 완전히 뒤엎어 놓은 것이다. 석호인이 황광은과 이종환을 데리고 내려온 것이다. 그들은 형보다 한 학년인가 윗반이었다. 나는 잘은 모르지만 당시 조선신학교라면 송창근, 김재준 목사가 이끌던 때였고, 강원용(姜元龍), 김관석(金觀錫), 조향록(趙香祿), 임인수(林仁洙), 이장식(李章植), 이일선 등 이 땅의 쟁쟁한 분들이 적을 두고 공부하던 지금의 한신(韓神) 전신이다.
황광은은 당시 학생이면서 <녹십자>라는 잡지의 발행자였고, 이종환은 그 잡지의 편집인이었다. 이 두 사람이 산골까지 와서 집회를 열자 마을 사람들이 집을 비우고 교회로 모여들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젊은 신학생들이라 호기심도 많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의 집회가 끝나고부터 교회는 언제나 차고 넘쳤다. 지금도 내 나이 또래의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곧잘 황광은과 이종환의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이승을 떠난 지 오래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나는 당시 모자에 백선 둘을 돌린 중학생이었다. 나와 두 분의 만남은 믿음보다는 문학면에서 뜻이 깊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황광은은 어디까지나 목사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아들을 돌보거나 기독교교회협회 같은 기관에서 일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동화작가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문학가연하지는 않았다.
그의 동화집 두 권은 참으로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1956년에 발간된 ‘날아가는 새 구두’(대한기독교서회)와 1963년에 펴낸 ‘호루라기 부는 소년’(글벗집)이 그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강소천(姜小泉)에 별반 못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나라 아동문학사에 황광은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으니 안타깝다. 그는 크리스천 문학인클럽이나 크리스천 문협에도 가담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돕는 입장으로 만족하는 편이었다.
김희보 목사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