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우리집 3병장 병역의무 떳떳하게 잘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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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내가 모대학에 출강할 때 점심 식사 자리에서 어느 여 교수가 자기 아들이 자기를 보고 엄마는 계모냐고 묻더라 했다. 강남의 엄마들은 다 아들을 군대에 안보내는데 엄마는 외아들인 나를 왜 군대에 보내려 하느냐고 군대 가기 싫은 아들의 저항적인 소리였다고 한다. 그 여 교수는 “그래 나는 너의 계모다. 그러니 군대를 가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사나이답게 돌아오라” 이렇게 대답하고 아들을 입대시켜 그때 육군에 복무중이라 했다. 나라사랑과 판단력이 분명한 여 교수였다. 합법적인 병역면제라 하나 15대 대통령 후보 이회창은 두 아들의 병역면제가 부당한 병역기피로 선거내내 공격받다가 실패하고 16대 대통령 후보 때는 김대업 전과자를 거짓 군검찰관으로 꾸며 이회창 아들 병역기피 문제 대책회의까지 했다는 허위 사실을 진짜처럼 퍼뜨려 이회창은 16대 대통령에도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두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 때문이었다. 돈 거래로 병역비리는 어마어마하게 터져나오곤 했다.

6.25 때 전선에 안나가기 위해 손가락 두 개를 작두에 자른 청년도 있었다. 핫바지 농촌 출신 군인은 총맞아 죽을 때 “빽” 소릴 내고 죽었다는 말이 있었다. 고관대작 아들은 군대도 안 가는데 농촌출신 자기들은 빽이 없어 전선에 투입되어 전사하게 된 것이 억울하다는 소리로 “빽” 소리를 지르고 죽는다는 것이다. 미8군 사령관 밴프리트 장군의 아들은 공군장교로 6.25전투에 참전해 전사했다. 우리 자유와 나라를 지켜 주는 미군 밴 플리트(1892-1992) 대장의 아들까지 6.25 한국전선에서 죽어 갔는데 우리 고급 관리 아들들은 군대에 가지 않고 후방에서 차나 마시며 놀거나 유학길에 올랐다. 병사행정이 그 얼마나 불공정했던지 개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쥔 박정희 대통령이 병역미필자를 색출해 군대 보내고 병역미필자는 취직이 안 되게 했다. 그래도 약삭빠른 사람들이 호적 나이를 늘리거나 확 줄여 가며 병역기피를 교묘하게 했다.

나는 대학 재학중 대학생에게 1년 6개월 군복무 혜택을 주는 에스오(so) 군번을 피하고 대학 졸업후 부산에서 7대 1의 경쟁을 뚫고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다. 3개월 고된 훈련 후 진해에 배치되어 반공웅변대회에서 1등을 해 해병진해기지사령부 정훈참모실에서 해병진해주보 편집, 발행 일에 열심히 근무하고 1964년 12월에 병장으로 제대했다. 병장 봉급 그때 2백 원을 받았다. 막걸리 20병 정도의 봉급이었다. 해병 제대 후 결혼하고 낳은 두 아들이 대학 재학중에 육군에 입대했다. 귀신잡는 해병 입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장남은 대구 50사단에서 30개월 가까이 근무하고 육군 병장으로 1989년도에 제대했다. 지금 부산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차남은 논산훈련소 훈련을 다 마치고 강원도 인제 1군단 경비중대에서 보초 서며 군대생활을 육군 병장으로 잘 마쳤다. 두 아들이 군사훈련을 잘 받고 군대생활 무사히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장남 오안열은 군복무중 학군출신 대위가 트집잡아 너무 심히 때려 의무중대에 입원까지 했던 일이 가장 힘든 고비라 했다. 내가 장남 부대에 전화했을 때 마침 아들 때린 장교(소령 진급)와 통화했다. 오안열 병장 아버지가 모교대학 교수시고 선배신데 오안열 때린 일이 미안하다고 내게 사과했다. 병영문화가 바로 서 가야 하겠다. 지금도 사회에 장차관 국회의원 등 병역미필자가 많이 설친다. 바로 정리되어야 한다. 남자라면 씩씩한 군대 경험이 생활의 무기로 절대로 필요하다. 우리집 3병장은 떳떳하게 병역의무 잘 마치고 하나님 사랑 속에 기도와 믿음으로 잘 살아 가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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