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약자를 강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직 약자가 새로운 관점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다고 약자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왜곡이다. 바울이 말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을 여기에 통용하는 것은 바울의 생각과 철학을 왜곡하는 것이다. 바울의 자족함은 자유함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함의 의지와 영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기뻐하고 찬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그 증거다. 그의 삶은 언제나 자유를 추구했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자유함을 깨달았다. 율법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의 발견이다.
약자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자족함이 아니라 자유함이다. 나는 장애를 얻었다. 그리고 그 장애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심연의 내 존재마저 부인하게 했다.
이제부터 나는 마이너리티다. 마이너리티의 삶이란 어떤 의미인가? 마이너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마음을 아는가? 어찌되었든 마이너 리그의 선수들에게는 메이저에 대한 환상과 꿈이 있다. 그러나 내가 머물고 있는 마이너는 더 이상 메이저로 올라갈 수 없는 자리이며 이것이 내가 살아가야 할 존재의 양식이다. 이 절벽 같은 한계 앞에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내 삶의 자리는 하늘이 주신 자리이기에 거부할 수도 없다. 아니 거부하고 싶지만 한 가지 남은 것이 있다. 약자의 관점이 그것이다.
나는 왜 마이너리티가 되었는가? 나는 왜 약자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예수께서도 약자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를 작은 자라 하셨음이 그 증거다. 작은 자, 약자, 아니 마이너리티 예수가 내 가슴에 들어온다. 예수께서 약자가 되고 마이너리티로 사셨음은 내게 위로이고 희망이다. 마이너리티 예수를 닮자. 그것이 내게 은혜다. 약자의 관점은 나를 다시 부활시킨다. 약자의 관점에서 나는 새로운 꿈을 꾼다. 마이너리티의 자리를 사랑하자. 마이너 리그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재미있는 게임을 알려주고 싶다. 우리만의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마이너리티만의 패션과 우리만의 행복한 게임, 놀거리, 의미를 찾아주어야 한다. 우리도 즐거울 수 있음을 알자.
마이너리티 예수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나귀를 타야겠다.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의 메이저들의 천박함을 조롱하자. 마이너리티 예수는 바보 예수다. 그는 스스로를 마이너리티 작은 자로 부르신다. 거기에는 어떤 열등감도 없다. 마이너리티 예수는 자족감이 아니라 자유함을 가르쳐 주셨다. 나도 예수처럼 자유를 위해 오늘을 살아야겠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