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은 선악을 판단하고, 선을 명령하며 악을 물리치는 도덕의식이다. 이 양심이 하나님에 의해 사람에게 조각되었고, 아담의 범죄 이후 양심도 함께 타락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빛으로 들어올 때 죄는 드러나고 우리의 양심은 회복된다. 사도 바울 역시 말씀으로 인해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
그러나 회복된 양심으로 선하게 살려고 몸부림 칠 때 죄가 억눌러서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고 고백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도 지워지지 않는 가책을 받은 고뇌의 흔적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영하 15~16℃로 내려가는 살을 에는 듯한 추운 겨울, 이태원 삼각지에서 거지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그 지역은 한국 사람보다 미군들이 대다수였다.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미군 부대 앞에서 구걸하는 나를 보고 미군 종군 목사가 용산 원효로 근방에 있는 장애인들이 수용되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에는 농아를 비롯해 시각장애인, 정신장애인, 간질환자, 폭탄으로 팔을 잃거나 다리를 잃은 장애인, 24시간 앉아서 사는 장애인들이 있었다. 그중에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장애인 자매가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어느 날 그 자매가 내게 제안을 하나 했다. “오늘 저녁에 맛있는 수제비국이 나오면 너를 주겠다. 그 대신 너를 데려다 준 종군 목사님이 찾아와서 맛있는 초콜릿과 사탕과 과자를 주면 나에게 달라”는 것이다.
나는 수제비국을 받아먹을 욕심에 선뜻 좋다고 대답했다. 당장 눈앞의 수제비국과 언제 올지 모를 초콜릿과 사탕과 과자를 맞바꾼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수제비국을 받아서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종군 목사님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그곳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곳 노무자들의 횡포와 구타가 극심한 것과 정신장애인이 자신이 배설한 용변을 다시 집어 먹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나는 목사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리를 못 쓰는 김정웅이라는 동료와 함께 새벽 일찍 그곳을 나와 멀리 도망을 쳤다. 수제비국을 받아먹었으니 초콜릿과 사탕과 과자를 줘야 하는데, 그만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나와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하면 수제비국을 얻어먹은 자매에게 초콜릿과 사탕과 과자를 줄 수 있을까? 그 약속을 지킬 그날이 올까?’ 하는 생각을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후 나는 부산으로 멀리 내려갔다가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때는 시간도 많이 지났고 그 자매를 찾을 여건이 되지 못했다.
일반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면서 열악한 환경과 점자책 하나 없이 공부를 따라간다는 것은 순교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오로지 공부하는 것 외에는 신경쓸 수가 없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