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과 이방인에 대한 반감, 복음 전파 더뎌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성읍 교회 세워
조천읍 교회에 이기풍 목사 기념관 전시관에 자료 중에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 사모하는 천당 집 지금 찾아가오니 영원무궁하도록 주와 같이 살리라.” 윤함애 사모가 지은 찬송 시이다. 이 외에도 자녀에게 남긴 유언을 통해서도 이 땅에서 어떤 믿음과 가치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는지 드러나 있다.
지금은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제주이다. 그러나 100년 전 제주는 유배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 중에 유명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남긴 세한도(歲寒圖)만 떠올려도 당시 제주도의 이미지는 명확하다. 게다가 1901년 제주도 토착민과 천주교도 사이에서 일어난 ‘이재수(李在守)의 난(亂)’으로 제주도는 얼어붙어 있었다. 이 난으로 인해 제국주의와 결탁한 ‘야소쟁이’에 대한 반감, 외국인과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 제주도민에게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가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방방곡곡에 복음이 전해지는 때도 유독 제주는 복음 전파가 더디었다.
이기풍 목사는 성읍 교회를 발견했다. 성읍 교회는 종탑을 비롯한 옛 건물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성읍 마을의 예배 처소로 쓰이고 있다. 민속 마을 안에 있어서 개발에 제약이 있었으나 100년을 이어 왔다. 교회 담 안에 자리한 나무 한 그루, 족히 수백 년을 제주도의 바람을 이겨내며 교회와 함께 한 나무에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민속 마을의 이방 종교, 성읍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박해받은 것처럼 1909년 세워진 이래 모진 비바람을 감내했다. 이기풍 목사가 기도처로 매입했던 건물은 이전에 정의읍 성 천주교회였다. ‘이재수의 난’ 후 빈 교회가 되면서 이기풍 선교사와 당시 그와 동역했던 천아나 전도사가 인수했다. 읍내 ‘야소 쟁이’에 대한 엄청난 불신과 반감을 생각할 때, 교회를 세우는 것은 “죽으면 죽으리라.”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1948년 4.3사건과 한국전쟁, 이후 제주도가 휴양지로 변모하는 세월의 맞바람 속에서도 이어졌다.
제주선교가 시작된 것은 이기풍 이전으로 올라간다. 제주 성내교회 마당에는 이기풍 목사, 김재원 장로의 공적비가 있다. 이기풍 목사가 성안교회를 세우고 성안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성내교회’라 이름했다. 김재원 장로의 묘지는 이기풍 목사 증손자인 이준호 목사가 발굴했다. 이기풍 목사는 “김재원 장로의 정보를 찾는 과정에서 후손들과 연결되었으며 묘를 찾기 위해 교회공원 묘지를 일일이 대조했다.” 한국 교회사에서 선교사를 제외한 국내인들의 정보가 매우 적다.
이기풍 목사는 처음부터 향교골을 찾았고 조봉호, 김재원, 김홍련, 홍순원과 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왜 “향교골”이냐?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오자 공부하는 곳을 제일 먼저 찾았다.
이기풍 선교사는 훈련받은 대로 학교를 먼저 세웠다. 이기풍 목사는 당연한 것처럼 향교골에 갔고 조봉호를 만났다. 조봉호는 금성리에서 태어나서 서울의 숭실학교를 졸업했다. 이런 교육적 배경을 가진 조봉호가 제주에 와서 한 일이 후진 양성이었다. 이기풍 목사와 조봉호의 만남은 여기에 접근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