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춘원의 첫사랑, 화가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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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은 어떤 글들이냐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춘원의 마음이 약간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춘원이 갑자기 귀국하면 주변에서는 또 말들이 많겠지. 허영숙 여자의 꾐에 빠져 국가 대사인 독립운동을 버리고 훌쩍 가버렸다고, 얼마나 조롱들 할까. 그러거나 말거나 요즘 안그래도 춘원의 심기가 많이 불편한데… 어쩌면 이 참에 경제적 어려움도 있는데, 물주까지 왔으니, 못 이긴체 하고 귀국해 버리자.

내침김에 심약한 춘원은 허영숙을 따라 바로 귀국하면 된다. 그러나 춘원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참 많아, 선뜻 그러자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춘원은 지금 자신에게 매달리며 귀국하자고 통사정을 하는 저 여자, 허영숙은 장차 내 아내가 될 사람인데. 완전 무시하자니 너무 매정한 것 같고. 나는 진정 저 여인을 사랑하기나 하나? 없으면 아쉽고, 만나면 그저 든든할 뿐인, 보통 여자! 저 여자는 나의 물주며 보호자일 뿐이다.

못보면 죽을 거 같고, 만나면 가슴이 터질 듯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사이가 진정한 사랑의 연인이라면,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이 두 사람 사이는 왜 이토록 떨림 같은 짜릿한 감정이 없을까? 춘원이 이윽고 허영숙을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꼭 내가 귀국해야 하오?” “응! 지금 당신 신변도 위험하고… 건강도 걱정되고… 달리 글 쓸 일도 많고요.” “달리 쓸 글이라니요?” 춘원이 글 이야기가 나오니, 이제야 궁금하다는 듯 물어본다.

“당신 맨날 시시껄렁한 글만 쓸꺼요? 불멸의 대작을 써야지. 당신 좋아하는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뛰어 넘는 눈부신, 작품을 써야지요.” 

허영숙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한껏 춘원을 꼬시고 있었다. 그러나 확 다르게 기분 잡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춘원의 표정을 보고는, 앗차! 내가 실수! 곧 허영숙은 조금전 무의식중에 내뱉었던 자신의 말을 곧 정정 사과했다. 

“시시껄렁한 글이란 말은 취소해요. 내가 말 잘못했어요.” 허영숙은 정중히 사과했다. 춘원은 자존심이 아무리 상해도 자신의 감정을 금방 직설적으로 나타내는 일은 거의 없다. 시간을 가지고 그것을 내심 삭이는 지극히 내성적인 사람이다.

“우리 내일 새벽에 귀국합시다.” 춘원은 이곳에서의 모든 일들은 버려둔 채 귀국해서 이제 또 무언가 새로운 환경에서 글을 써야 될 것 같다는 희망적인 생각으로 그는 귀국을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동경삼재(東京三才)

일제 강점기 ‘아시아의 런던’이라고 불리던 일본 동경(東京)에는 우리나라 유학생이 약 400여 명이 있었다. 그 당시 조선인은 이들이 선망의 대상이며 장차 이 나라 희망이었다. 동경삼재가 습득한 근대 지식을 자신들의 삶에서 실천하고 후세대 청년과 소년들에게 출판 및 저술 활동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

이들 동경 유학생 가운데 크게 주목받았던 동경삼재 세 사람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喜)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그리고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이 세 사람들에게 기대가 매우 컸었다.

홍명희는 1888년, 최남선은 1890년, 이광수는 1892년에 태어났으며 각각 두 살 터울이었다. 한말 일제시 한 사람은 양반으로 또 한 사람은 중인으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몰락한 양반(평민)의 계급으로 태어났지만, 한 시대 동경이라는 곳에서 이 세 사람은 신분을 떠나 깊은 교류를 할 수 있었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유학생 독립선언과 3.1운동에도 함께 참가하면서 나라를 걱정했다. 특히 최남선은 민족의 대표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최남선은 일경의 눈을 피해 광문회 소속 임규의 일본인 부인의 안방에서 약 3주일 만에 이 독립선언서 초고를 써서 최린에게 전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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