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26)   

Google+ LinkedIn Katalk +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 2> 

한국보육원 원생들의 기록 ②

한국보육원 출신 임용재 씨 회고 

황 형님 내곁에서 친절과 사랑으로

저렇게 선하고 좋은 사람 또 있을까

황 목사 사랑의 씨앗 삶의 좌표 돼

임용재의 회고

다음은 한국보육원 출신으로서 현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음악선교사로 교회 봉사를 하고 있는 임용재 씨의 회고이다.

나의 소년기는 한 마디로 말해서 깡패였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란 싸움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었고, 나도 운동을 좋아하다 보니 사람을 때리는 싸움에는 누구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나의 학교생활이란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학생인 체하고는 누가 나보다 강한 놈이 있다고 하면 반드시 싸움을 걸어 때려 눕혀야 마음이 풀리곤 했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취미였고 쾌락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했던 황달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6‧25때라 황달병의 치료는 그리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때 황 형님은 내 곁에 있어주며 친절과 사랑으로 감싸 주었습니다. 그때 내 마음 속에는 뜨거운 어떤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렇게 선하고 좋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황 형님은 우리나라 대표로 외국에 갔다 돌아오시면서 나에게 하모니카를 선물로 사다 주셨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생전에 그렇게 좋은 하모니카는 처음 보는지라, 그것을 만질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하모니카에 흥미를 느껴 매일 신나게 불었습니다.

황 형님은 어느 날 내 하모니카 부는 솜씨를 칭찬하시며, “너는 음악에 소질이 있다”고 말씀하시더니, 보육원에 비품으로 있던 C멜로디 색소폰을 내게 주시면서, “열심히 연습해 봐! 그러나 부탁인데, 이것을 밖에 내다가 팔거나 없애면 나는 교육부장직을 박탈당한다. 알았지?”하고 웃으시며 내 어깨를 치셨습니다.

그 악기로 열심히 연습을 해 어느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원장 어머님께서 몇 가지 악기를 구해 주셨고, 또 한경화 음악 선생을 모셔오셨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매일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에 미군 C.A.C 부사령관으로 파견된 미군 소령 길버트라는 분이 한국보육원에 30여 종의 악기를 기증해 주셨고, 또한 아침 저녁으로 지프차를 타고 와서 지휘를 해주셨습니다. 우리 악단은 제법 발전하였고 지휘자 길버트 소령은 우리를 헬리콥터로 인솔해 서울 미8군 사령부에 가서 여러 번 연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7함대 사령관 등 특별한 장성들이 올 때면 우리 악단이 연주를 하곤 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지휘자 길버트 소령은 미국 오하이오 대학교에서 음악 교수로 재직하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인으로 파견을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 고아로 형성된 한국보육원이지만 너무나 좋은 환경이었다는 것을 지금 새삼 느끼게 됩니다.

황 형님은 우리 밴드를 좋아하시며 뒷바라지를 참 많이 해주셨습니다. 또한 한국보육원에 소년군을 창조하시고, 나를 소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셨습니다. 나는 700여 명의 소년군을 거느리게 된 것입니다. 그 안에는 헌병대가 있어서 법을 철저히 지키도록 해 질서를 유지했으며, 때로는 제주도 주최 행사에도 우리 소년군이 참여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황 형님은 나를 부르시더니, “이번 세례식에는 꼭 세례를 받아라” 하시기에 나는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황 형님은 P.M.C. 클럽을 만들어, 우리 또래 7명을 선정해 금요일 저녁이면 세계평화기도회로 예배를 보곤 했습니다. 그 클럽의 표어는 “참으로 찾는 빛 비취는 날 있으리”였습니다.

내가 성장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황 목사님은 주례를 해주셨습니다. 황 형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병문안을 갔더니, 몹시 쇠약해진 모습이라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랬더니 황 형님은 오히려 내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아. 곧 낫게 될거야”하시며 나를 위로하시던 모습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의 소년 시대에 불량하게만 살던 나의 생활을 바른 길로 잡아주시고, P.M.C. 기도회를 통해서 늘 강조하시던 말씀, “정직하게 살아라. 항상 다른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라. 의의 길에서는 대담하라.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라”고 하시던 황 형님의 뜻을 따라 일생을 그와 같이 살려고 마음으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정년으로 직장에서 퇴직을 했으나, 일찍이 배웠던 클라리넷과 알토 색소폰으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황 목사님의 뜨거웠던 사랑의 씨앗이 나의 남은 삶에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늘 다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생들의 생활상

원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갔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귀한 자료 한 장이 있다. 필자는 누구인지 적혀 있지 않다. 황광은 목사가 서거한 뒤 그의 유품에서 나온 16절지 크기의 종이에는 어린이의 서툰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우리 아동시는 지난 4월 16일에 시회 의원(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4월 18일 시회의 첫 모임을 가졌었습니다. 따라서 시회에서는 헌법을 제정하고, 5월 5일에 아동시장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동시에는 시장 및 각부 부장이 있어 대한민국과 같은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는 전부 학교로 갑니다. 그리고 오전 공부가 끝나면 곧 집에 돌아와서 아동시민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때가 되면 어느 선생님 한 분 없이 우리 아동들끼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에 갔다 오면 곧 자기 직장을 찾아갑니다. 농림부원은 농장으로 혹은 목장으로, 교체부원은 우편국이나 교통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교체부에서는 곧 우리 시민들의 편지 혹은 전보의 배달과 자동차 유람도 하게 됩니다.

재무부원은 재무부로 가서 우리 아동시민에 대한 재정에 관한 사무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동은행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돈은 한국은행권 100원이 아동은행권 1원으로 환산되며, 이 돈만 가지면 학용품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생활 필수품을 전부 살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상공부에서는 매주 세 번에 걸쳐 매점을 열기 때문에 시민들은 무엇이든지 살 수 있으며, 우리 아동시민의 이발, 세탁, 전기시설을 맡아 일을 하며, 함석부에서는 대야와 양동이를 만들어 우리가 쓰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무부에서는 도로 수선 혹은 건설에 대한 모든 것을 하게 됩니다.

보건부에서는 우리 아동시민의 건강을 위해서 DDT 소독이나 불결한 곳을 청소하기도 하고, 시민의 어떤 상처든 돌보아주게 됩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