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향기] 대구 남성교회 박노황 원로장로

Google+ LinkedIn Katalk +

‘빛과 소금’ 사명 잘 감당한다면 사회 더욱 발전할 것

박팽년 17대손 유림 가문에서 태어나 예수 믿고 고난 극복

박노황 장로(83)의 고향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이곳은 사육신 중 하나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살던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박 장로는 박팽년의 17대 손. 전형적인 유림 가문에서 나고 자랐지만 중학교 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박 장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게 됐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지역사회에 덕을 많이 세우셨고 마을에서 존경받던 어른이셨지요. 하지만 집안이 가난해 어려서 내가 아주 어렵게 공부를 했어요. 소위 요즘 말로 내가 흙수저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했고 극심한 흉년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호롱불을 켜고 공부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하다가, 의사이신 하빈교회 김선빈 장로님께서 성일중학교를 설립하시면서 중학교 2학년으로 다시 입학하게 됐지요. 그때부터 교회도 다니게 되고 내 삶의 방향에 대전환이 이뤄지게 된 겁니다.”
박 장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신문 배달, 기름 장사 등 일을 하며 공부했고 방학 때는 보따리 장사하는 누나의 집이나 친지 댁을 옮겨 다니며 자취생활을 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면서도 우등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공군에 입대했다. 공군에 지원한 것은 군복무를 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구 K-2 공군기지 항공본창 제81통신전자수리대대에 배치됐고, 청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 법학과에 입학하게 됐지요. 군복무를 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공부했어요. 그래도 군복무 중에는 등록금이 감면됐었는데 제대하자 더 이상 혜택을 받을 수 없어 학비를 벌기 위해 제대복을 입고 장사를 다녔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일거리가 없었어요. 청년 시기를 정말 어렵게 보냈지요. 허기가 져서 어질어질한 가운데에도 열심히 공부를 했고 장학금을 탔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어려운 사람, 배고픈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숭늉 한 그릇이라도 베풀고 나누고 싶습니다.”
박노황 장로는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학창 시절, 청년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고난의 연속, 극복의 연속이었습니다. 가끔 내 삶을 돌아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숲을 지나가는데 길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한 가지 한 가지 내가 헤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가는 거예요. 비록 힘이 들기는 했지만 그 속에서 끈기도 배우고 열정도 배우고 인내도 배웠지요. 또 우리 주님 주신 은혜가 있었기에 그 어려운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거고요. 어려움을 겪으면서 얻은 교훈들이 몸에 밴 덕에 공직생활도 잘 해낼 수 있었습니다.”

35년 공직생활 중 기독신우회 창립 가장 큰 보람

박노황 장로는 대학 졸업 후 바로 공무원채용 공개경쟁시험에 합격, 1965년 공직생활을 시작해 대구광역시 달성군 부군수까지 지냈다. 하지만 35년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퇴직할 때까지도 박 장로는 예금통장 하나 없었다. 여러 보직을 거치면서 때론 이권을 취할 수 있는 자리에 앉기도 했지만 박 장로는 결코 사리사욕을 챙긴 적이 없었다. 공직자로서 마을을 정비하고 시민의 생활을 좀 더 나아지게 했다는 것만이 그의 보람이었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 박 장로는 3년 동안 대구시 시설관리공단 전무이사직을 맡았는데, 그때도 박 장로는 동분서주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다.
“내가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청렴하게 공직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권 부서에 있을 때도 내가 시험을 당하지 않았어요. 예전에 매달 본청 각국 주무계장들의 투표로 동료 자랑 시상 제도가 있었거든요. 동료들이 직접 상을 주는 겁니다. 표창자의 사진을 1년간 대회의실에 걸어놓았어요. 1972년 11월 전원 만장일치로 제가 그 상을 받았어요. 동료들이 인정해 주는 상이니 더욱 기쁘고 자랑스러웠지요.”
공무원으로 맡았던 일에도 성취와 보람을 느꼈지만 박노황 장로가 가장 보람을 느꼈던 일은 대구시청 기독신우회를 창립한 일이다.
“1977년 10월 대구시청 기독신우회를 만들고 초대 총무를 맡아 직장선교 활동에 힘을 썼어요. 또 대구경북지역 직장선교연합회를 창립해 부회장을 맡아 기관단체 간 교류와 연합예배 등을 통해 대구지역 복음화 운동에도 기여했지요. 대구시청 기독신우회 회장을 맡았을 때는 경북 8개 시‧도 기독공직자들과 함께 지리산 노고단에서 ‘기독공직자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주제로 산상기도회를 열기도 했어요. 기독교인 공직자들이 신앙의 양심으로 공직에 임한다면 지역사회와 나라 발전에 더욱 큰 보탬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공로로 박 장로는 녹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체육부장관 표창, 대구시장 표창 등을 받았다.
박노황 장로는 비라카미선교회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올해 창립 25년을 맞은 비라카미선교회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단체로, 지금까지 교회 230여 채, 신학교 두 곳, 14개 병원, 사랑의 집 126채를 지었다.
2003년에는 친분이 있는 장로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포함해 ‘빛과 소금회(현재 회장)’라는 선교봉사단체를 창립했다. ‘빛과 소금회’는 연말이면 성구 전시회를 개최해 판매기금으로 다양한 봉사를 한다. 대구지방경찰청 경목후원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출석하기 시작한 남성교회를 통해서도 다양한 봉사활동에 앞장서 왔다. 치매센터에서 목욕, 세탁, 청소, 식사 도우미 등 궂은 일도 마다않고 10년을 넘게 봉사했고, 새벽 인력시장을 정기적으로 찾아 무료 급식 봉사활동도 꾸준히 했다.
현재 박 장로는 정부양곡을 정미하는 ㈜풍국산업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풍국산업 옥상에 마련된 벼 체험장에서 견학 온 아이들에게 쌀의 생산과정을 보여주며 쌀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덕분에 매일 출근해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
“전에 허리 수술을 하고 몸이 좀 아팠던 적이 있었어요. 아픈 몸을 이끌고 어둑어둑한 새벽녘에 식물들에게 물을 주려고 아내와 같이 옥상에 올라왔는데, 동녘에서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어둠이 좌악 물러가는 겁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느꼈지요.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직하게 살자. 신앙인으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자. 결국에는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빛과 소금의 역할을 사명으로 여기며 기독교인들이 살기를 바랍니다.”
박 장로는 가난한 자신에게 시집와 고생한 부인 김말숙 권사에 대한 고마움과 최근 손자 박종호 씨가 삼성바이오로직스 취업에 합격한 소식도 전했다. 또 시를 가르쳐준 오성건 장로에게도 지면을 빌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박노황 장로의 소망은 그의 자손들이 신실한 믿음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나는 유림가정에서 태어나 예수님을 믿게 됐지만 우리 자손들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해 그들이 이루게 될 가정들도 대대손손 믿음의 명문가정이 되는 것이 나의 소망입니다. 또 내가 공직에 오래 있어서 국가관이 투철합니다. 교회에서 대표기도를 할 때도 항상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정과 나라가 주님 다스림 아래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밖에 더 무얼 바라겠습니까.”
/한지은 기자

▲ 부인 김말숙 권사 팔순이던 2022년 찍은 박노황 장로 가족 사진.

▲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 채용시험에 합격한 손자 박종호 씨와 함께. 뒤로는 사육사당 앞 육각비가 보인다.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