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1)  이기풍 목사 ⑥

Google+ LinkedIn Katalk +

의료선교에도 최선을 다해 협력함

전국 누비며 선교로 바쁜 일정 소화

이기풍 목사는 소학교를 세워 제주민과 선교의 접촉점이 되었다. <사기 교육 편>에 “1908년 제주도 성내교회에서 남녀 소학교를 설립하여 자녀들을 교육하니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성내리교회가 1908년 설립됐음을 확인했다.

이기풍 목사는 또 의료선교를 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는 1909년부터 해마다 군산, 전주, 목포, 광주, 순천 등지 다섯 선교회 의사와 목사들이 각 지역 미션스쿨의 학생과 교회 학생들과 함께 제주교회 유치부, 유년부, 성경학교를 돕는 등 교육과 의술을 펼쳤다. 1910년 목포의 변요한 선교사와 의사 포사이트 선교사가 제주에 와서 복음을 전하며 매일 400-500명씩 진료했다. 

포사이트 선교사는 제주에 함께 온 협력자 중 일부를 제주에 남겨서 진료하게 했다. 이런 의료 활동은 이기풍 목사 선교에 협력이었다.

1912년 5월에 윌슨(광주 기독교병원장) 선교사가 한국인 조수들과 함께 제주에서 오전에는 70명 정도의 외래환자를 진료하고 저녁에는 3-4회 수술했다. 한번은 윌슨이 성내교회에서 진료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곧 죽게 됐다고 왕진을 간청해서 환자에게 달려가 열과 성의를 다해 진료했다. 

한편 이기풍 목사는 목회에 열정을 쏟았다. 매년 1-2월은 성경학교를 열었고 육지부에서 각 선교회로 순회하며 목사와 사모, 미션 학교 학생, 의사들에 협력했다. 

3월에는 도내 각 학교 졸업식에서 이기풍 목사가 강연했다. 동시에 육지 성경학교에도 이기풍 선교사 초청이 많았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선교 이야기와 함께 선교비를 모금했다. 사람들도 제주로 초청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13년을 기점으로 제주선교를 전라노회가 전담했다. 1914년 전라노회는 제주선교를 전적으로 위임받았다. 전라노회로서는 부담이 컸다. 이기풍 목사는 노회에 참여했다. 이기풍 목사는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한다. 육지부 선교학교 학생들과 목사들을 초청해서 한 달 동안 도내에서 선교학교를 운영했다. 7-8월 여름성경학교를 열심히 전개했다. 

9월이면 정기적으로 열리는 노회와 총회에 참석했다. 참석해 선교 보고했고 전국 교회를 다니며 설교와 선교비를 모금했다. 그리고 제주교회를 방문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 후 곧바로 겨울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성탄절도 육지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당시 목포 양동에 있는 교회 교인들이 왔었고, 전주 신흥학교에서 학생들, 평양에 있는 여전도회원들이 와서 성탄절 행사를 성대하게 했다. 성탄절이 끝나면 곧바로 겨울성경학교가 열렸다. 

이기풍 목사는 바쁜 선교 일정을 보냈다. 이기풍 선교사는 1913년 열심히 선교하던 때 과로로 6개월간 휴가를 얻었다. 평양에서 휴식했다. 그때도 평양지역 여러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제주선교 후원을 요청했다. 

1915년에 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말은 하는 데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고 성대가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이 치료를 위해 휴가를 얻어 제주를 떠났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