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거짓말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지만 요즘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참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치인이 누구를 안다, 모른다느니 또 누구를 만났다 만나지 않았다느니, 그리고 또 다른 정치인이 특정 모임에 참석했다 안 했다느니, 끊임없이 이런 공방이 온통 신문지면을 덮고 있으니 시민들의 마음은 불편하다. 너무 쉽게 밝혀질 사실을 놓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안이 그렇게 간단한 것 같지 않다. 예를 들어 정치인 A가 어떤 인물 B를 안다고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안다 모른다는 것은 몇 가지 간단한 조사를 통해서 쉽게 밝혀질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선 A가 B를 안다는 말의 의미부터가 간단하지 않다. 우리말에서 안다는 것의 의미는 실로 다양하다. 내가 그 사람 아주 잘 안다고 말할 때의 ‘안다’와, 단지 만난 적이 있다는 정도로만 ‘안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여러 단계의 ‘안다’라는 의미가 있다. 모른다고 거짓말하는 당사자는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한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함으로써 간단하게 거짓말을 피해갈 수 있다. 그러니 언제나 모른다는 말이 명백하게 거짓말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게 된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많은 경우 세상일의 실체적인 진실을 밝히는 일이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1+1=2와 같은 수학적인 진실이나 양자역학과 같은 과학적인 사실도 증명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논증과 실험에 의해 진위가 명백히 가려질 수는 있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아는지와 같은 역사적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데는 조사자의 객관성에 대한 믿음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피조사자와 조사자가 모두 사람이라는 사실이 문제를 어렵게 한다. 조사자가 어느 한 편에 치우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조사결과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 간의 은밀한 대화나 사적인 만남은 추적이 매우 어렵고, 많은 경우 대개 합리적 추정으로 증거를 대신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경제학이나 역사학과 같은 사회과학에서는 객관적인 사실을 찾는 것이 언제나 어렵다. 예컨대 소득주도성장을 비롯한 수많은 민감한 정책은 찬반 어느 쪽이든 언제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낼 수 있기 마련이다.
저명한 유대인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1967년 ‘진실과 정치’라는 글에서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치에서는 진실이 아니라 의견만이 중요하게 된다는 놀라운 주장을 했다. 정치세계에서는 언제나 거짓말이 난무할 수밖에 없으며,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보다는 다수의 사람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느냐가 정치과정에서 더 중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히틀러의 나치즘을 비롯해 스탈린의 전체주의,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미국의 베트남전쟁 등 수많은 정치 현상을 분석하면서 이 같은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아렌트는 현대정치에서 거짓과 선동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깨어 있음으로써 이 같은 정치의 본질을 간파하고 정치 엘리트들의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는 “생각할 줄 아는” 대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터넷과 SNS에 의해 주도되는 여론에 휩쓸리기 쉬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치인의 거짓을 판단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정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하는 아렌트의 주장은 우리 현대인에게 더 큰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김완진 장로
• 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