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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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 2> 

한국보육원 원생들의 기록 ③

문화부•사회부•사령부 등 아동시 생활

결혼이 사회사업에 부담될까 염려 고민

친구 성숙, 황 목사께 감탄할 일 많아

김유선 여사도 드높은 뜻으로 사회봉사

또 문화부 안에는 아동신문사가 있어 신문을 매일처럼 내어와 시민뿐만 아니라 내빈 되시는 분들까지 보게 됩니다. 또 문화부에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도서관에 들어가서 재미나는 책을 보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부에는 미술부, 문예부, 음악부, 극단부가 있어 가끔 우리에게 미술 전람회나 음악회 혹은 연극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사회부에서는 시민이 앓아 누워서 돈을 벌 수 없는 아동들에게 구제하는 등 여러 가지로 구제에 대한 것을 전부 도맡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년군과 소녀군 및 유년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년군 사령부에는 사령부 직속인 헌병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잘못했을 때에는 헌병대에서 심사가 있은 후 아동재판으로 넘기게 됩니다. 재판소에서는 이를 헌법에 따라 처리하게 됩니다. 곧 죄를 사해줄 수 있는 방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 아동시의 생활입니다.

한국보육원과 김유선 여사

황광은 목사는 한국보육원 교육부장 시절이던 1951년 김유선 여사를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 결국 황광은 목사와 김유선 여사는 다음해인 1952년 4월 26일에 결혼하게 되지만, 결혼식을 올리기까지는 또 많은 고민이 있었다. 황광은으로서는 결혼이라는 것이 사회사업을 하는데 부담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오는 고민이었다.

당시 김유선 여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교편 생활을 하다가 제주도에 와서 황광은 선생과 만나게 되었다. 김유선 여사에 대한 가정과 경력 이야기는 항목을 달리해 좀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에는 당시 한얼중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친구 김성숙 여사가 1983년 10월 14일자로 김유선 여사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다. 그 편지는 ‘인간 황광은’을 읽으며 보낸 것이다.

그리운 유선에게

어제 네가 보내준 책과 편지를 잘 받았다. 그렇게 바쁜데도 한 주일에 세 번 신학교에 나가다니 유선이답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건강하여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으니 참으로 축복이다. 그러나 항상 건강에 주의하기를 바란다.

딸 진숙이, 은숙이가 결혼을 해서 벌써 아이들을 낳고, 특히 목사 사위를 얻었으니 크나큰 축복이다. 아들 둘을 데리고 살아가는 네 모습을 그려본다. 나는 분명히 믿는다. 너의 4남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 살아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온 정성을 다 바쳐서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신 훌륭한 아버지를 가졌는데,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이 어디로 가겠니!

나는 어젯밤 일곱 시에 자리에 앉아 네가 보내준 책 제6장까지를 꼼짝하지도 않고 앉아서 읽다가 고개가 아파서 읽기를 그만두고 자리에 누웠다. 그 책을 읽으면서 황 목사님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너무도 너무도 감탄할 일이 많아서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 책을 읽으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아무튼 혼자 읽기는 아까운 책이고, 왜 하나님께서 황 목사님을 일찍이 데려가셨는가 하는 것을 알 것 같았다. 황 목사님이 천국에 가셔서 좀 편히 쉬어야지 이 세상에 더 계시면 너무도 고생하시고 수고가 너무도 많겠기 때문이 아니겠니. 남아 있는 식구들은 세상에서 보지 못하니 섭섭하겠지만, 그러나 유선아, 그분은 지금 얼마나 편히 쉬면서 남은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겠니!

책을 다 읽고 나서 또 편지 쓸께. 책을 보내 주어서 참으로 고맙다. 늘 주안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인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숙 씀

황광은 목사와 김유선 여사가 결혼하는 전말을 황광은 목사 못지않게 드높은 뜻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한 김유선 여사의 글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다음 글은 황광은 목사가 서거한 다음해인 1971년 5월 30일에 엮은이에게 써준 것이다. 글 속에 나오는 ‘나’는 물론 김유선 여사이다.

한얼중학교 교사

나는 6‧25사변이 나기 바로 한 달 전인 1950년 5월에 이화여자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에 방학 때가 되면 뜻맞는 친구들과 함께 농촌운동을 다니며 우리나라 농촌 형편이 생활하는 것이라기보다 생존에 허덕이는 현실임에 안타깝게 생각해오던 터였다.

그 당시 경상남도 진해군 진영에 한얼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하던 강성갑 목사님의 신앙과 사상 그리고 애국심은 그 당시 우리에게 많은 감명을 주어 오던 터이기에 졸업한 뒤에 처음 가지는 직장은 바로 한얼중학교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 학교는 남학생들뿐이었다. 가난한 농촌 각처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자기들 스스로의 손으로 흙벽돌을 만들어 교사를 짓고, 숙소를 마련하고, 농사짓는 일 등 여러 가지 작업을 많이 하면서 공부하는 학교였다.

농어촌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시작한 학교이니만치 학비는 거의 면제되어 있었으므로 경영난으로 말미암아 무척 애쓰면서도 새로운 의도로 교육을 실천해 나가는 학교였다. 그러한 산 정신과 정열에 이끌려 나는 순수한 첫 정성을 기울여 열심히 교육을 하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원래 강성갑 목사님은 민족과 국가를 살리는 길은 농촌 부흥에 있고, 그러니 중학교 교육을 통해 그들에게 한국의 얼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사상은 한얼학교 교훈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자.’

이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 교장이나 교직원이나 학생이나 할 것없이 함께 흙벽돌로 학교를 세우고 농가 각 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감나무를 심어주며, 바쁜 농번기 때 학생들의 봉사 활동은 정말 눈부신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 지방에서는 강성갑 목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나와 같은 한얼에 부임한 나의 가장 친했던 친구 김성숙은 영어를 가르쳤고 나는 물상 과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생물이나 화학을 가르치라면, 좀 괜찮게 가르칠 수 있을 듯한데, 물상이란 과목에는 광물이니 전기니 기계니 하는 각 분야의 항목이 나오는 데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나로서는 교안이나 교과목 준비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만큼 벅찬 형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들을 인솔해 흙벽돌을 만드는 일이나 모내기를 하는 일 등 참으로 고달프기는 하면서도 또한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시작된 지 1개월도 채 되기 전에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인 6‧25가 터진 것이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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