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편 부모님을 만나 뵙고 싶으시면 한가하실 때 한번 만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라는 큰딸의 편지가 있었지만, 연말연시 그리고 장남 결혼에 쫓겨 이듬해 1월 19일에야 상대방 부모를 찾아보게 되었다. 만일 그녀의 시가(媤家)가 순천이 된다면 큰아들의 처가는 속초요 큰딸의 시가는 순천이 되어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지경을 너무 넓혀주신다고 생각하며 평생 처음 밟는 순천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먼저 순천 제일교회의 후배인 박 목사에게 연락해 김 군의 아버지에 관해 물었더니 너무나 훌륭한 분이라고 극찬하는 것이었다. 순천대학 임학과 교수로 단풍나무를 길러 가로수로 순천시에 기증하시기도 하고 교회에서는 장로님으로 신앙도 좋은 분이라는 것이다. 김 장로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품격있는 한 식당에서 점심 대접을 해주셨다. 또 장로님 댁에 들러 집 주변에 심어 놓은 묘목들과 잘 가꾸어 놓은 분재도 감상했다. “그놈이 돈 들여 유학시켰더니 가서 연앨 했군요”라는 말도 구수했다. 올 때는 예쁜 꽃 분재를 하나 선물로 주어 받아오기도 했다.
처음 우리는 아직 공부도 마치지 않은 대학생과 무슨 결혼? 하고 시큰둥했었다. 그런데 만나본 김 장로 내외는 매우 믿음직스럽고 소탈하며 호감이 가는 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장남을 결혼시킨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 뒤, 두어 달 지난 때였다. 큰딸에게서 또 편지가 왔다. “김○○ 씨께는 결혼에 대해 저도 여러 가지로 결정을 미루는 상태이므로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순천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잘 말씀해 주세요. 제가 알기론 좋으신 분들 같은데 어머니, 아버지, 장로님 댁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4월 중 친구를 찾아 유럽여행을 하고 오겠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아르바이트하던 보험회사 근무도 그만두고 싶다고도 했다. 지난해로 수학과 대학원도 그만두고 시간제로 고등학생 과외를 봐 주다가 댈러스에 있는 한 보험회사에 전임으로 일하고 있다더니 그것도 정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뭔가 자기 나름으로 자기 인생을 새로 개척하려는데, 정리가 안 되어 파리에 있는 친구를 만나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다시 5월 초에 김 장로님 댁을 찾았다. 뭔가 결론을 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우리는 결혼을 미루어보자는 의견 대신 웬만하면 빨리 결혼을 시켜 공부에 지장이 없게 하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전되었다. 상대방 김 군에게서도 편지를 받았는데 자기는 현재 정치경제를 전공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이 분야를 공부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이 분야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면 그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자기도 신학교 진학을 생각했지만, 그때도 목회자가 아니고 자신과 가족을 책임지면서 평신도 전도자로 살고 싶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우리는 김 군이나 김 장로님 내외분을 마음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큰딸은 5월 16일 갑자기 한국 우리를 찾아 귀국했다. 남편감인 김 군의 아버님이 결혼하게 빨리 귀국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랴부랴 서둘러 6월 7일 김 장로님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결혼 후 미국으로 들어가 김 군이 다니는 대학의 부부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는데 1987년 2월에 어린애를 낳을 것 같다며 불안해해서 아내는 이제는 국제 파출부로 단신 미국을 가게 되었다. 예쁜 딸이었다. 처음 안아보는 외손녀인데 얼마나 예뻤겠는가? 그런데 19개월 만에 둘째 딸을 또 출산했다. 이제 그녀는 두 애를 기르면서 공부하는 남편 시중드는 전임 주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정을 그런 방법으로 축복하셨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