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 2>
한국보육원과 김유선 여사 ①
숨막히는 시기, 민족의 장래 암담
김성갑 목사 빨갱이로 몰아 총살
김유선 여사도 수색하며 주목
목숨을 버리고자 하면 얻으리라
나는 학생들과 같이 모내기하던 손을 멈추고 북쪽 하늘로 계속해서 날아가는 비행기만 안타깝게 가슴 죄며 바라다볼 수밖에 없었다. 공산군이 점점 남으로 내려오게 됨에 따라 대구와 마산까지 위태롭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남쪽에 위치한 진영 일대에까지 계엄령이 선포되게 되었다. 정말 숨막히는 위기의 시기였고, 민족의 장래가 암담하게만 느껴지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우리 교장이시던 강성갑 목사님이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한얼중학교 학생들이 각처로 그의 행방을 찾아 보았으나, 그의 행방은 끝내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학생들은 낙동강 하류에서 시체 하나를 건져내게 되었다. 몸이 퉁퉁 불어서 누구의 모습인지 분별할 수 없었으나 허리에 감긴 채 있는 허리띠의 연세대 마크를 보고서 그것이 강 목사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에 강 목사를 시기해 오던 악질적인 유지들이 그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해 그를 빨갱이로 몰아 총살시키고 만 것이다.
피난지 부산
우리는 통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와 성숙이는 불안과 공포와 실망과 허탈감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 일이 생긴 며칠 뒤 우리는 어떤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싹오싹 소름이 끼쳐지는 것을 느꼈다. 지서에서 공연히 우리를 오라 가라 하고, 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라디오를 압수하는가 하면 우리 일기까지 수색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까지 빨갱이로 몰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느껴졌다.
우리는 이런 형편 속에서 학교와 학생을 뒤에 두고 떠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대로 머무를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불안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피난민의 대열 속에 휩쓸려 한얼중학교를 찾아오는 서울 손님들이 매일 매일 늘어나게 되었다.
그때에 조향록 목사님, 김형석 선생, 이주훈 선생, 이춘우 선생, 그밖에도 우리가 학생 시절에 알았던 반가운 분들이 수십 명 몰려들게 되었다. 우리는 한 달 빨리 내려온 때문에 피난민이 아니라 주인의 입장에서 피난민 선생님에게 진영의 그 유명한 복숭아밭에 가서 복숭아를 사서 대접할 수 있는 얼마간의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얻으리라 하신 성경 말씀에 대해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졸업 당시 서울 모 여학교에 취직을 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모 대학교의 실험실에 남을 것인지 무척 망설이기도 했었는데, 한번 희생해 살아 보겠다고 뛰어든 이 생활이 도리어 미리 피난온 결과가 될 줄이야 그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이러던 어느 날, 부산에 가족들과 함께 피난나와 있던, 나의 동창 장혜원(전 뉴욕 한국교회 담임 임순관 목사 부인)이 찾아왔다. 그는 우리의 형편을 보더니 어서 부산으로 가자고 서두르는 것이었다. 혜원이는 우리들의 옷을 자기 손으로 챙겨서 가방에 담아 가지고는 우리에게 뒤따라 곧 오라고 누누이 당부한 뒤 그날 밤차를 타고 부산으로 떠나갔다.
그 다음날 아침, 우리는 차마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에게는 떠나겠다는 말을 못하고, 주위의 몇 분에게만 한 마디 인사를 나눈 뒤 진영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부터 기차가 끊어져 버리고 말아 우리는 걸어서 부산에 도착했다.
우리는 곧 부산에 위치한 제5육군병원에 취직을 했고, 거기서 전쟁의 비극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껴 가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바쁘면서 뜻있는 나날을 보낼 수가 있었다. 나는 그런 생활 중에서 감사의 조건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