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2023.1.22)을 지낸 후 대보름(2.5)을 거쳐 雨水(2.19)까지는 명절 휴가철이다. 농촌에선 농한기라 새봄 농사를 시작하기 전 준비운동을 하는 시기이다. ‘설’은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로 정착되어 “살”(몇 살인가?)이 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낯이 설다(낯설다)에서 ‘설날’이란 명칭이 왔다고도 한다. 7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1월 1일)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들을 모아 회연(會宴)하고 明神에게 배례(拜禮)했다는 기록이 있다. 3세기에 나온 중국의 ‘三國志’나 ‘위지’(魏志)의 동이전(東夷傳)에 있는 제천의례의 기록에서도 ‘설’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고려사’에도 설날(元正)은 상원(上元), 상사(上巳),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 중구(重九), 팔관(八觀), 동지(冬至)와 함께 9대 민속절(民俗節)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엔 설날이 한식,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 중 하나로 지켜왔다. 해마다 정초에 패수(浿水)에서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고 소리 지르며 놀았다고 한다. 이는 편싸움 특히 석전(石戰)의 원류로 추정된다. 정월 설날은 三國(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특별한 명절로 지켜 시조묘에 제사도 지내고 죄수들을 사면하기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정월 대보름의 세시 풍속과 십이지일(十二支日) 별로 금기사항도 적어놓았다. 고려시대엔 왕이 정초에 천지신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렸고 정월 초하루를 전후해 공직자들에게 7일간의 특별 휴가를 주었으며 신하들은 왕에게 신년축하 예를 올렸고, 왕은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고려시대엔 불교가 융성해 팔관회와 연등회 등 불교 행사가 성행했고 조선시대엔 억불 숭유정책으로 조상에 대한 제사가 더 중시되었다. 설날이나 대보름 같은 민속 명절은 전체 국민들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동족의식으로 상호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횡적으로 ‘우리는 하나다’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종적으로 조상과 자손들의 연결고리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래서 하나의 축제 마당으로 얽어주는 것으로 민속놀이가 있다. 민속놀이는 민속종교, 민속문화, 민속예술 등으로 표현되고 전승되어 왔다. ‘민속’이란 ‘민간의 풍속’으로 같은 지방에서 같은 시간을 사는 사람들의 ‘하나 됨’을 즐기는 행사이다. 그래서 지배계층의 상층(상류) 문화보다 피지배인 하층(하류 서민) 문화의 성격이 더 강하다. 음악의 예로 봐도 궁중에서 주로 연주되던 아악(정악)에 비해 하층 음악인 풍물(농악)놀이가 더 흥겹고 널리 퍼진 이유다. 민속놀이 역시 생성-전파-흥행-쇠퇴의 과정을 겪는다. 어떤 놀이나 행사가 민속화 되려면 당대 사람들에게 애용되고 반복됨으로 토착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연날리기’나 ‘썰매 타기’는 민속놀이라 할 수 있지만 ‘모형비행기 날리기’나 ‘스키 타기’는 민속놀이라 할 수 없다. 바둑이나 장기는 민속놀이라 할 수 있지만 ‘전자오락’은 민속놀이라 하지 않는다. 계절별 민속놀이를 살펴보자. (1) 봄철(3-5월)엔 세배, 동신제, 풍어제를 비롯해 널뛰기, 윷놀이, 연날리기, 돈치기, 승경도 놀이, 달맞이, 줄다리기, 석전(石戰), 답교(踏橋), 놋다리밟기, 원 놀음, 고싸움, 차전놀이, 쇠머리대기, 풀각시놀이, 활쏘기, 탈춤, 풍물놀이들이 있다. (2) 여름철(6-8월)엔 농사와 여름철 건강 관련 놀이들이 많다. 호미씻기, 논매기를 끝낸 후 단오굿, 풋굿, 석전, 풍물, 씨름, 그네타기 및 고누와 천렵을 즐겼다. (3) 가을철(9-11월)엔 추수를 중심으로 감사절 행사가 많았다. 추석 전후로 달맞이 강강수월래, 소놀이를 비롯해 어린이들은 술래잡기, 꼬리따기, 문턱 넘기 등을 즐기고 어른들은 강강술래, 거북놀이, 소놀이, 탈춤, 풍물 등으로 흥을 돋았다. (4) 겨울철(12-2월)엔 풍작에 대한 감사와 월동 준비에 힘썼다. 폭죽놀이(대불놀이), 제기차기, 팽이치기, 연날리기 등을 즐겼다. 이렇듯 민속놀이는 농경 문화와 관계있고, 지역 공동체의 단결과 상호협력 그리고 민간신앙의 행사로 진행되었다. 하늘과 조상신을 받들고 산신, 서낭신, 별신을 섬겼고, 성주, 조왕, 터주, 삼신, 업신을 집안으로 모셨으며, 길흉화복을 비는 안택도 했다. 현대 도시 생활에선 거의 경험할 수 없지만 옛날을 이해하는 단서로서 소개하는 것이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