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입을 열고 말씀하신다. 갈릴리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신다.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리아 여인은 누구인가?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자신들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슬픈 일이다. 아프고 괴로워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얼마나 절망적인가? 사마리아 여인은 이방인 취급을 당했다. 혼혈이라는 이유로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거절당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당하던 차별은 지금 우리 사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탈북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정상적인 직장을 얻을 수 없고 결혼도 마찬가지다. 남한에서의 삶은 너무도 거대한 편견의 장애물을 넘는 것과 같다.
다문화가정의 자녀와 이주여성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당한 그런 차별을 받는다. 혼혈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세상에 혼혈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세상은 그렇게 혼혈로 만들어진 공동체임에도 마치 우리는 순혈이라는 말도 안 되는 문화에 중독되어 살았다.
지금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유대인 안에는 백인은 물론 황인종과 하물며 흑인까지 온갖 인종이 두루 분포한다. 이미 순혈의 유대인은 없다. 오랜 디아스포라의 삶에서 이미 그들의 피는 섞였고 그런 이유로 지금의 유대인은 겉으로의 유대인이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유대인을 말한다.
그런데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는 왜 그런 차별과 편견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예수가 찾아가신 곳은 소외의 공간이었으며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답하며 대화하셨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었던 그들에게 유대인 청년의 출현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말이 통하는 것을 넘어 예수는 그들의 편에 서셨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비난을 넘어 욕설과 저주의 말로 그들로부터 억울하게 당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주셨다.
그런 예수의 마지막은 침묵이었다. 차라리 죽이라는 말보다 더한 침묵이었다. 왜 그분은 침묵하셨을까?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던 분이 한순간 입을 닫는다.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살갑게 다가서시며 대화도 잘하시던 분이 거룩함을 빙자한 성전주의자들과 예루살렘 사람들 앞에서는 침묵으로 죽음을 자초하셨다. 그 순간 그분의 눈빛을 상상해 본다. 분노였을까?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체념이었을까? 아마 이 모든 것들이 섞여 미묘한 눈빛이었을 게다.
오늘 예수를 묵상하며 내 목회와 선교를 생각한다.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셨듯이 나 또한 힘없고 작은 자들의 편들기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예수처럼 말하기를 거절하고 침묵하며 진정 용기 있는 신앙인으로 살고 싶다. 나의 스승 되신 예수의 발뒤꿈치만이라도 따라가며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