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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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0년 3월 이 총장이 연임할 때 교수협의회의 제청에 따라 대학원장이 되었다. 당시 교협은 타 대학과는 달리 총장은 이사회에서 선임하고 대신 대학원장은 교수협의회에서 제청한 사람으로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총장과 함께 2년 동안 일하게 되었다. 이 총장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물러나자 제3대 총장에 취임하게 된 분이 화학과의 박종민 총장이었다. 이때는 이사회가 총장을 선임하지 않고 교협에서 직선하되 총장 후보자 2명을 이사회에 추천하면 그중 한 명을 총장으로 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총학과 노조는 3자 공동으로 총장을 추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사회는 교협의 제청을 따라 1992년 제10대 총장으로 박종민 박사를 임명했다. 그는 1954년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본 대학에 부임한 후 대학의 교수 장학금으로 미국 에모리(Emory)대학을 거쳐 1973년 플로리다 주립대학(Florida State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다. 

그분은 한남대학교 최초의 교협 직선 총장이었는데 취임식부터 수난을 겪었다. 3월 17일 11시 성지관(대학교회)에서 취임식이 있을 예정이었는데 ‘총장 취임 결사 저지 결의대회’를 가진 총학생회는 30여 명이 교직원과 몸싸움을 하면서 식장 내로 난입해 구호를 외치고 취임을 반대했다. 삼자 합의가 아닌 교협의 독선이라는 것이었다. 난동이 있자 25분 만에 급하게 취임식을 마무리했다. 

박 총장 체제는 많은 과제를 안고 출발했다. 법인의 대학 전입금 부족으로 먼저 모금 운동을 조직적으로 해야 했다. 전임 총장은 구호는 요란했지만, 국내 모금이 약했다. 이때는 전국 각 대학의 직선 총장이 ‘대학발전기금’모금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때여서 발전기금 모금은 우리 대학 초미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 총장은 이런 분야에는 크게 재능이 없는 신사였다. 교무위원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4년 뒤에 있을 ‘대학평가’를 대비해서 장기 계획을 세우는 일을 시작했다. 비대해진 대학에 교수의 절대 인원이 부족해서 교원충원을 하고, 연구비를 대대적으로 확충해서 대학평가를 대비했다. 실제로 임기 4년 동안에 90명 가까운 교수를 충원했지만,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그래도 1 : 40이었다. 박 총장은 그래도 요란한 구호 없이 알찬 일을 많이 했다. 1996년은 대학 창립 40주년이었다. 그래서 1992년에는 ‘한남대학교 40년사’ 편찬을 기획해서 나는 편찬위원장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또 대전대학을 세운, 사라져가는 역사의 인물들을 수소문해 ‘Han Nam in My Life’라는 대학사에 남는 귀한 책도 영문으로 출판했다. 여기에서는 대전대학을 세우기 위한 회의, 학교용지 선정, 기획 등에 참여한 선교사들의 살아 있는 증언을 읽을 수 있으며 특히 대전대학 창학이념인 ‘사명 선언(Mission Statement)’을 서두에 써 놓은 책이다. 

박 총장과 함께 일하던 첫해 끝에 그는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떤 교수가 대학원장을 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좀 양보할 수 없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 총장 때 교협의 추천으로 보직을 받은 사람인데 이제 새 총장이 되었으니 나를 해임하고 새 대학원장을 임명해도 되지 않느냐고 누군가 말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교협에서 추천한 사람이 총장이 되었으니 교수를 대변할 대학원장을 둘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 자리를 탐하는 고참 교수가 있는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교협에서 총장 후보로 추천했는데 낙선한 다른 한 동료인지도 몰랐다. 대학 초창기 한창 몰려다니며 포커게임하고 소셜 댄스 즐기던 시절의 친구가 “나 대학원장 시켜 주면 안 돼?”라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냥 임명하고 갈아치우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정치라는 것을 모르는 신사며 미식가였다. 일식집 아니면 잘 가지를 않았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물러났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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