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 거기 너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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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쯤 되는 이야기다. 그때 나는 미국 LA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니 모르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와서 면담을 요청했다. 이윽고 초췌한 몰골로 나를 찾은 20대 아가씨는 나는 자기를 모르지만 자기는 나를 잘 아는데 어려운 부탁이 있어 찾아왔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그때 내 친구가 전화해서 아마 지금 웬 유학생이 찾아가니 이야기를 듣고 선처를 부탁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선 이야기를 듣기로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신은 유학생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역시 유학생인 친구와 룸메이트를 하며 함께 같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제 친구가 갑자기 사망했으며, 미국 생활에 서툰 자기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생벼락같이 몰려온 엄청난 재난에 어찌할지를 몰라 허둥거리다가 나를 찾아 도움을 청해보라는 지인의 의견에 따라 이렇게 왔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생소한 이국땅에서 갑자기 닥친 어려운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떨고 있는 가여운 인생을 돕기로 하고, 나의 모든 자질을 발휘해서 낯선 미국의 장례절차에 따라 일을 진행했고 마침 알고 지냈던 병원 원목으로 있던 목사님의 집례로 간소한 장례식을 조촐하게 치렀다. 어려운 형편으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고국에 계신 홀어머니에게는 전화로 설명하며 의논해 후에 서신으로 사진만 보내기로 하고 화장하기로 했다. 열 명도 안되는 적은 수의 조문객들은, 유학생의 꿈도 펴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친구를 ‘불쌍해서 어떡하니’ 흐느끼면서 가슴 속에 있는 슬픔을 아로새기면서 먼저 눈을 감은 친구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장례식을 끝내고 나는 그들에게서 제대로 된 감사의 인사도 받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는 자부심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 일을 계기로 가급적 장례식에는 열심히 찾아 조문하기로 인생의 방침을 정하게 되었다. 이 일은 그 후로도 나의 인생에서 살아가는 지표가 되었으니, 「‘거기 너 있었는가?’하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으면 ‘네, 그때 저는 거기에 있었으며,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라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커다란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면서 남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슬프고 어려운 일에는 더욱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에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다. 관을 쓰고 이젠 어른이 되었다는 예식을 치르는 관례(冠禮)는 예전에 일찍이 사라졌고, 조상의 기일에 드리는 제례(祭禮)는 아직도 상존하지만 이는 한 집안의 행사로 굳어진 형편이지만, 아직도 장례를 치르는 상례(喪禮)와 결혼식을 하는 혼례(婚禮)는 친척이나 친지들을 초대해서 치르는 커다란 행사로 남아있다. 다만 그 결혼식도 이제는 그 숫자가 줄어드는 추세며, 더욱이 결혼식에 주례를 모시고 거행하는 풍습이 점점 줄어들면서, 교회에서 거행하기보다는 예식장을 선호하는 풍습으로 변화했다. 그러면서 결혼식은 하나의 형식적인 모습이 되면서, 참석하지 않고 축의금만 보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청첩장에도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방법’ 하면서 은행 구좌번호를 표시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예로부터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 것이 사람의 본분으로 여겨졌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당연히 우리의 할 일이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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