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18세에 낳아주신 우리 5남매의 어머님, 진주 하씨 하석임 여사는 훌륭한 어르신이다. 5세에 친정 어머님을 여의셨고 일본 여자와 일본에 사는 친정 아버지와는 떨어져 진주 당신의 막내 숙부댁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신병 치료차 함양 마천의 백무동에 요양하면서, 마천 도촌(속칭 섬말) 빈농가 장남 오문달 청년을 중매해 15세에 두메산골 마천 도촌으로 시집 오셨다. 심한 보릿고개 모진 고난을 겪다가 일본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에 건너가 남편의 노동에 의해 생계를 유지했다. 효자 남편은 돈을 벌어 부모님 계시는 숙부댁으로 다 보냈다.
광복을 앞두고 할머니 병세가 위독해 귀국했다. 할머니 병세는 호전되고 광복을 맞으면서 다시 일본에 가지 못했다. 도촌에 새 집을 짓고 할머니 모시고 살았다. 어머님은 큰 며느리로 효부셨다. 논에 밭에 나가 일도 열심히 하고 때로는 도촌 뒷산 곰달래산에 올라가 게발딱루 나물도 뜯어왔다.
시동생들 셋 결혼에도 힘써 주셨다. 공비가 설치는 마천에서 자식을 교육시킬 수 없다고 남편을 설득해 함양 읍내로 이사를 나왔다. 나의 중학교육을 위해서는 비로드 치마라도 팔아서 학비를 대겠다고 하셨다. “자식은 쪽박을 차더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신념이 뚜렷했다.
그리고 5남매에게 “너희는 뼈있게 살아가거라” 하며 삶을 일깨워 주셨다. 어머님 기도와 희생, 교육정신 때문에 나는 대학원까지 진학해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너희 아버지 무식에 내가 늘 한스럽더니 네가 나의 한을 풀어 주었구나” 하시면서 기뻐하셨다.
젊어서 바느질 솜씨도 고우시던 어머니는 한가위 설날 등에 베틀에서 손수 짠 무명베로 자식들에게 새 옷도 지어주셨다. 그야말로 양주동 박사가 지은 ‘어머니 노래’에 나오는 대로,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키워주신 은혜가 크다.
함양 읍내 살 때 식량이 없어 함양 읍내 쌀창고에 불이 났을 때 불에 탄 쌀을 퍼와, 앞 고랑물에 돌을 골라 내고 화근내가 나도 쌀밥을 해 주신 부모님 은혜가 크다. 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맹자, 율곡, 한석봉 어머니의 교육정신 못지않은 훌륭한 교육의 어머니가 바로 하석임 우리 어머니임을 깨닫게 된다. 한글을 해득 하시어 마천 도촌에 살 때, 마을 아낙네들의 편지도 대필해 주시곤 했다. 덕스런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2007년 9월 16일 미수의 연세로 하늘나라 가신 어머니 한정없이 그립다. 지금 아버지 산소와 함께 젊은 날 사시던 마천 도촌 곰달래산 기슭에 모셨다. 아우와 함께 여러 해 벌초를 했다. 돌아가신 뒤 벌초가 무슨 효도가 되랴! 생존시 따뜻하게 모시지 못했던 불효죄가 뼈저리게 가슴 아프다. 후회막심하다.
정철의 시조 한구절인 “지나간 후면 애닮다 어이하리”처럼 돌아가신 후 불효 암만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버지 어머니 생존시 잘 모실 것을 오늘도 뼈아픈 후회로 내 가슴은 마냥 아프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 아닌가!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