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주워 온 돌베개를 베고 밤마다 자면서 춘원은 구약성서의 야곱을 생각했다. 괴로운 밤마다 춘원은 자성의 되새김질을 하며, 반추(反芻)하는 소(牛)의 한숨 소리를 들으면서 잠들곤 했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답답해 더 견디기 어려울 때는 봉선사 운허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얼마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광동중학교’에 가서 어린 학생들에게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면서 스스로 마음을 위로하며 달래 보기도 했다.
춘원이 가장 사랑하고, 하고 싶은 일은 역시 글쓰는 것으로, 춘원은 다시 남양주 ‘사릉’집으로 돌아와서 평소 그가 가장 존경했던 스승, ‘도산 안창호 전기’를 쓰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이어 그는 수필집 ‘돌베개’를 출간하고 연이어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調信)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단편소설 ‘꿈’을 써 냈다.
춘원은 조금만 시간적 여유가 있어도 언제나 한결 같이 글 쓰는 것이 그의 타고난 운명처럼 보였다. 춘원은 문학을 너무나 사랑했다. 춘원은 분명 조선이 낳은 천재 문학자 소설가다. 그는 시인이며, 수필가이며, 평론가이며 사상 논객이였다. 그러면서 독립운동가이며 자상한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러면서 문학을 사랑하는 뭇여성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춘원은 일제 시대에는 일본인에게 잡혀 다녔고, 대한민국에서는 반민법(反民法)에 의해 친일 분자로 시달렸고, 북한은 반동이라고 그를 잡아 갔다. 정말 이것은 춘원 개인의 불행이며 한국 근대사의 불행이며 우리 문학의 손실이기도 했다.
삼한사온의 사계절이 있고 청명하기로 유명한 조선의 가을 하늘을 춘원은 누구보다 사랑했다. 3월이면 온 산야에 질펀하게 피어나는 진달래, 철죽, 매화, 유채꽃, 미선나무꽃, 벚꽃 등을 무척 좋아해서 그는 이때쯤 되면 운허가 있는 봉선사를 찾아가 온 산야를 어린 아이처럼 휘젓고 다녔다.
“춘원은 분명 이 나라가 낳은 국보급 천재 문필가였지만, 지난날 격동기를 스스로 민족의 반역자가 된 불행한 사람이었다”라고 혹자들이 평가하면 틀린 말이 될까…?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많은 동족들이 해를 입을 것이라고 믿었다. 일제 말기 일본의 ‘도쿠도미’가 춘원에게 슬며시 내민, 조선 지식인 3만 명이 넘은 살생부를 직접 확인한 춘원은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해방 후, 춘원은 봉선사에서 운허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한바 있다. “나에 대한 평가는 먼 훗날, 이 나라 역사가 제대로 평가할 것이다”라고.
그런데 한 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춘원은 ‘춘원 문학상’ 제정과 문학관 설립은 고사하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매섭게 매도되고, 그의 순수한 문학작품까지도 온갖 증오의 대상이 되어 아직도 차갑게 냉대를 받고 있다. 춘원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가 한국 근현대사에 미친, 눈부신 순수한 문학 공과에는 전혀 배려가 없다.
해방 후, 친일 범죄자로 반민특위에서 처벌받고 풀려나와, 회한의 눈물로 범벅이 된 춘원이 야곱의 돌베개를 베고 밤잠을 제대로 못잔 세월의 아픔이 무수히 많았다. 지금에 와서 틀림없이 분명해 보이는 것이 꼭 하나 있긴 하다.
춘원의 사랑은 분명 ‘조선’에 있었고 세 아이와 가족에 있었고 그의 문학에 있었다. 그중에 가장 큰 사랑은 역시 자신이 태어난 조선에 있었음을 우리는 그의 수많은 작품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그가 약관 30세에 쓴 ‘민족개조론’을 보면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염려했는지 알 수 있다.
바로 이 ‘민족개조론’은 도쿄의 2.8독립선언과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신문 주필로 항일 독립정신이 한창 들끓었던 때 작성된 것이다. 이 시기는 분명히 춘원은 순수했으며 춘원이 친일 언행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였다.
춘원은 1923년 민족주의 정신을 일깨워 주던 ‘동아일보’에 입사, 편집국장을 지냈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춘원은 ‘민족개조론’을 발표했던 바로 그해,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수양동우회’를 김윤경 등과 조직, 항일 투혼을 불살랐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