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한국문화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예술가 한 사람의 영향력은 설교 한 편보다 커… 문화의 힘
하나님께서는 목사로서뿐 아니라 음악가로서의 꿈도 이루게 하셔
문성모 목사가 지난 3월 12일 강남제일교회(함요한 목사 시무)에서 퇴임식을 갖고 목사로서의 40년 인생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작곡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다짐했다.
이날 퇴임식에선 ‘신학으로 묻고 음악으로 답하다’는 제목의 ‘한밀 문성모 박사 성역 40주년 은퇴 기념문집’ 출판감사예배도 함께 거행돼, 7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문 목사 평생의 기록들이 발표됐다. 문집 안에는 문 목사의 자서전을 비롯해 지인들이 밝힌 그에 관한 증언들, 그리고 저서, 논문, 칼럼, 에세이, 설교 등 집필 원고들과 음악 작품, 다양한 사진 자료들이 수록됐다.
인터뷰를 위해 3월 23일 만난 문성모 목사는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 마련된 공간에서 작곡 작업을 하고 있었다. 찬송가 1000곡을 만들어 하나님께 봉헌하기로 하고 지금까지 약 300곡을 썼다.
“1000곡 중 남은 700곡을 쓰려면 앞으로 일주일에 한 곡씩만 써도 15년 걸려요. 이런 목표를 가지고 은퇴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지요. 나는 작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해요.”
문성모 목사는 1983년 목사 안수 받고, 광주제일교회에서 목회, 대전신학대학교와 서울장신대학교 총장을 거쳐, 강남제일교회 목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하지만 목사이기 이전에 문 목사는 사실 음악가였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문 목사는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를 졸업했고 그의 오랜 꿈 역시 음대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런 기도를 했어요. 내가 하나님께 좋은 곡을 써드릴테니 나를 작곡가로 만들어 달라고. 그게 내 어릴 때 기도야. 중학교에 들어가니 음악 선생님이 예수 믿는 사람이셨는데 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니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음악 지도를 해주셨어요. 그때는 음악 레슨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또 우리 집이 지원할 형편도 못됐고. 내가 작곡 공부를 하다가 선생님께 여쭤보면 대답해주시면서 지도해 주셨어. 그렇게 내가 음악을 배웠지. 선생님께서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당시 한국음악협회에서 개최한 콩쿠르에 나가라고 하셔서 나갔다가 작곡부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난 그걸 하나님 은혜라고 생각하지. 그만한 실력이 안 되는 거 같은데 상을 받았으니까. 그러다 서울에서 경기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담임선생님의 아들이 나를 보고는 서울예술고등학교를 가라고 하는 거예요. 난 그때 그 학교 이름을 처음 들었어요. 원서를 사러 서울예고에 갔더니 원서 파는 사람이 내 행색을 보고는 어디에서 왔냐고 묻길래 대전에서 왔다고 하니 날더러 그냥 가라고 해. 지방에서 아무리 잘해도 이 학교에는 못 들어온다며. 사정을 해서 원서를 달라고 해 겨우 시험을 봤고 합격을 한거야.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지. 내가 그만 한 실력이 안 되는데 하나님이 붙여 주셨으니. 그리고 음대 교수가 되려고 서울대 국악과에 들어갔던 거예요.”
일찍부터 서울에서 유학을 하면서 문 목사는 학비며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대학교 3학년, 지휘자를 구한다기에 교회를 찾아가니 담임목사가 없었다. 교회 장로들이 그에게 설교를 맡겼다.
얼떨결에 설교를 시작했고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일이 생겼다. 동아 콩쿠르에서 입상까지 해 음대 대학원 과정만 마치면 오랜 바람대로 교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그에게 교회 장로들은 신학대학원에 가서 목사가 되라고 했다. 장신대 신학대학원 합격통지서를 받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그제서야 아버지는 24년 동안 매일같이 아들이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오셨다는 말씀을 꺼내셨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는 매일 새벽기도하시며 내가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고 해요. 아들에게 음악가로서의 길이 계속 열리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기도하시면서 내게는 한 번도 신학교를 가라 거나 목사가 되라거나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어. 그런데 결국 아버지의 기도대로 된 거지. 인간적인 개입 전혀 없이 순전히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셨던 그 믿음을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후 목회할 때나 학교를 경영할 때 아버지의 기도가 늘 생각났어요.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돈 한푼도 없이 광주제일교회 예배당을 짓고, 대전신학대학교와 서울장신대학교에서도 건축공사를 무사히 이끌 수 있었지요.”
문성모 목사는 대전신학대학교와 서울장신대학교 총장 재임 시절 약 500회의 부흥회를 인도했다. 계획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으로부터 요청이 왔고 부흥회를 통해 감동한 교회와 교인들이 건축기금을 보내왔다. 그렇게 세 번의 예배당을 완공했다.
예배와 음악을 한국화하겠다는 사명 장신대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문성모 목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국의 예배와 신학, 목회, 음악이 전부 미국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후 독일 유학을 하면서는, 독일교회에서 독일 찬송을 부르고 독일식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독일교회에서는 그들의 찬송가를 불러요. 독일 찬송가는 독일교회사예요. 루터부터 독일교회사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찬송이 되어 교인들의 입에서 불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삼일절에 부를 우리의 찬송이 있나? 8.15에는? 6.25에는? 우리의 추수감사주일 찬송은 뭐가 있을까? 다 미국찬송만 부르고 있어요. 한국교회에는 한국의 문화가 전혀 없는 겁니다. 문제 아닌가요? 여기는 미국이 아닌데도 미국과 똑같은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반성도 없고 그저 사람만 많다고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문성모 목사는 “우리 음악은 철학이자 종교”라고 힘주어 말했다.
“세종 때부터 있던 우리 음악인 정악을 정리한 악학궤범에 보면 첫머리에 이렇게 시작해요. ‘음악은 하늘에서 나서 인간에게 접하고 자연에서 발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우리 음악이야말로 종교음악이고 철학 아닌가. 그것도 모르고 우리 전통음악을 기생음악, 무당음악, 불교음악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배척한 채 미국 문화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을 보면서 내 평생 예배와 음악을 한국화하겠다는 사명으로 작업을 해왔던 거지요.”
강남제일교회 설교 강대상은 우리의 쌀 뒤주를 개조해 만들었다. 서울장신대학교 예배당 스크린은 우리 두루마리의 형상을 본떴고, 목사 가운은 한복을 개량해 입었다. 성찬식에선 도자기를 사용했고 부활절에는 우리나라 기쁨의 색인 색동으로 꾸몄다. 한국교회 문화를 한국화하겠다는 문목사의 실천이었다.
“강대상은 하나의 신학이에요. 그런데 고작 장사꾼들이 만든 것을 사다 쓰면 어쩌나. 예전(禮典)의 색은 전부 문화예요. 우리 민족의 고난의 색이 무엇인지, 기쁨의 색이 무엇인지 고민을 해야지. 미국 어느 목사가 예배 때 박사 가운을 입기 시작하니 언제부턴가 한국 목사들도 예배 때 박사 가운을 입어요. 이 얼마나 우스운 모습입니까. 예전에 우리는 예배를 시작하며 ‘묵도’를 했어요. 묵도는 우리 한국교회에만 있는 전통이었다고. 묵도의 신학을 발전시켜 자랑으로 삼아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묵도’가 없어지고 ‘예배의 부름’이라고 바뀌었어요. 미국교회에서 하는 ‘call to worship’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쓰는 거예요. 고민도 연구도 안 하고, 민족의식도 없고, 문화적 자부심도 없는 거예요.”
문 목사는 “문화란 삶”이라며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당연히 미국과 다른 문화를 가져야 하는데도 자꾸 미국 문화를 도입하려고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오래전 바티칸에 갔더니, 아프리카에서 기증받았다는 예수상이 흑인이었어요. 필리핀 유니온신학교에 갔을 때도 강당에 있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이 필리핀 여인과 필리핀 아이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우리 얼굴의 예수님과 마리아를 떠올리지 못할까. 큰 문제인데 문제로 삼지도 않아요. 그저 얼마나 모이는가 숫자에만 매달리지요. 하지만 숫자는 언젠가 무너지게 돼 있어요. 100년 전 어느 교회에 몇 명이 모였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요. 마찬가지로 100년 뒤 한국교회에 몇 명이 모였는지 사람들이 기억할까? 기억 못해요. 남는 것은 결국 문화야.”
문 목사는 한국교회가 여전히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실이 문화를 외면하는 데 일조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화가 없는 교회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문화는 투자하는 거지 당장 눈앞에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난 문화는 비타민이라고 생각해. 비타민이 없어도 성장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병든다고. 문화 없이 성장한 교회는 병이 들지요. 지금은 한국교회 곳곳에서 그 병들이 나타나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목사는 다시 희망을 말한다. 3.1운동 당시 기독교인은 2%도 되지 않았지만 그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도 3.1운동을 반대했다. 전국적 봉기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3.1운동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한국인에 의해 교회가 주도됐다. 그 시기에 ‘묵도’도 생겼다.
“지금도 단 몇 교회만 의식을 갖고 모인 다면 한국교회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교회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뭐가 있을까. 바로 문화예요. 좋은 음악인이나 예술가 한사람의 영향력은 설교 한 편보다 크지요. 그 가치에 대해 알아야 해요.”
문 목사는 24살 때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가면서 음악가의 꿈을 접고 목사가 됐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목사로서뿐 아니라 음악가로서의 꿈도 이루게 하셨다. 한국교회음악작곡가협회 이사장, 한국찬송가공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고, 현재는 한국찬송가개발원 원장, 한국국민악회 회장, 한국음악평론가협회 공동이사장 등을 맡아 음악가로서의 사명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 재능과 사명을 통해 한국교회에 진정한 한국문화를 심고 키워 한국교회가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문 목사는 인터뷰 내내 한국교회 안에 한국문화가 빈약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념문집을 출간한 것도 그런 이유다. 목사로서 그의 40년 역사는 한국교회의 역사이면서 또 오늘의 한국교회가 회복할 단초인 문화라는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기도 하다.
“예배는 문화예요. 예배 전체를 한국적인 시각에서 고민해보는 그런 문화운동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한국기독교 140년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한국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설교에서 회자되고 찬송가로 불리고 예배 속에서 되살아나기를, 그렇게 한국교회가 우리만의 문화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