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내 딸아! 살면서 외롭고 괴로울 땐, 이 찬송가를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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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는 그의 생애 초기는 봉건적 사회제도를 타파하고자 하는 사회 사상가로서 가부장제를 배격하고 자유연애를 주창하였으며 조혼의 폐습을 이야기하였다. 또 ‘무정’에서는 신교육을,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을, ‘흙’에서는 농민계몽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민족개량과 문화주의로 일관하던 춘원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겪고 정신적인 지주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상을 뜨자, 그의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결국 춘원은 그가 지닌 사상인 ‘민족 개조론’ 정신과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자아의식에 빠져, 본격적으로 친일행위로 들어선다. 

이는 민족개조론의 핵심인, 실력양성론이 가진 태생적 한계라 볼 수 있다. 식민지 지배 하에서 아무리 실력양성을 위해 노력해 본들, 식민지라는 상황 아래에서는 실력양성이, 곧 식민지 본국의 경제적 구조애 종속될 수밖에 없고 사상적으로도 식민지와 식민지 본국 사이의 동화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는 태생적 약점에 빠진 것이다. 

즉 오히려 자신에 대한 불만족은 민족독립 의식만을 약화시키는 결과만 낳게 된다는 춘원의 판단이었다. 이와 같은 춘원의 사상은 그 당시 신풍조로 등장한 ‘사회진화론’의 영향이 컸었다. 이것은 그 당시 제국 열강들이 약소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였던 사회과학의 사상이기도 했다.

이 사상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에 의해서 주장된 사회진화론이었다. 이때 스승 도산 안창호는 춘원이 이 사상에 빠져 있는 것을 걱정했고, 기회만 오면 춘원이 친일을 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애제자 춘원이 경성으로 귀국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였지만, 도산은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지금도 도산 안창호는 지하에서 땅을 치며 그것을 몹시 아쉬워하리라. 그 때 춘원의 귀국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던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고아로 자란 춘원은 성격 형성이 내성적이며 심약했다. 그러면서 누구보다 자아의식과 자존감이 컸으며 우월감으로 이 나라에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자기가 곧 조선이며 자신만이 이 조선민족을 살린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이러한 춘원을 보고 ‘유아독존’, ‘과대망상증’ 환자라고도 했다. 조선의 독립은 요원하며 앞으로 실력을 길러서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춘원의 ‘사회진화론’은 그의 뼛속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악랄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을 이겨내는 길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던 춘원에게 어느 날, 이 나라에 독립이 도둑같이 찾아왔다. 이때 춘원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춘원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리벙벙 멍해진 머리를 감싸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해방되고 반민특위에 끌려가서 법정에서 춘원은 솔직히 자신의 변절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당시 춘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민족의 배신자, 변절자 이광수! 라고 모두들 침을 뱉고 욕을 했다.

춘원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자신의 주장만을 구차하게 변명하는 위인으로 지탄을 받았다. 그후 춘원은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속죄하며 고통 속에서 살다가 납북되었다.

남양주 ‘사릉’집에 칩거하면서 춘원은 강가에서 주워온 돌베개를 밤마다 베고 잠을 잤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10살배기 어린 막내 딸 정화가 이렇게 물었다. “아빠! 아빠는 푹신한 베개를 놔두고 왜 맨날 딱딱하고 차가운 돌베개만 베고 자?” “응, 아빠는 잘못한 일 많아, 이렇게 한단다”라고 말을 하면, 딸은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또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잘못한 거 다 용서 받는 거야?”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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