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쪽 중화역 근처, 봉화산 기슭에 서양 중세시대 고딕식 모형이 깃들어 있는 영세교회가 우뚝 서 있다. 이 교회는 연희전문 국문과 출신이며, 연희전문 응원단장이었던 김종수 목사가 1969년 9월 7일에 주도하여 개척한 교회이다. 개척 당시에는 10여 명이 창립했지만, 54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일천여 명의 교인들이 출석하는 아담한 중형교회로 성장하였다.
개척자 김종수 목사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승동교회에서 일제 강점기 목회하던 김영구 목사의 아들이다. 목회자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 그의 아들은 부친 후계자의 길을 떠나 거의 15년 동안 탕자의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모친 박세라 사모님의 천사 같은 모습을 목격하고, 탕자의 생활을 청산하고 뒤늦게 신학을 전공하여 목회자가 되어 모친이 물려준 배꽃 피는 동산에 영세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김종수는 탕자의 생활을 하던 동안 밤늦게 귀가하면서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박세라 어머님에게 자주 술상을 차리게 하고, 신앙생활을 멀리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함에 따라 때로는 어머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박세라 어머님이 위암에 걸려 임종에 이르게 되었다. 그 순간 아들 김종수는 어머님! 저 때문에 이렇게 아프시게 된 것 같아요. 어머님! 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세요. 그때 박세라 어머님은 “종수야! 얘야 괜찮다. 다 모르고 그랬는 걸 뭘!” 하시면서 임종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아들 김종수는 회개의 눈물 속에 ‘돌아온 탕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배경 속에서 오늘날 영세교회 교인들이 신앙의 고귀한 유산으로 생각하는 ‘천국방언(天國放言, The Words of Love)’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성경에는 둘째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을 아버지에게 달라고 졸랐다. 유산의 몫을 분배받은 둘째 아들은 세상 연락 속에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참담한 모습으로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의 반대 속에서도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까지 벌여 환대했다(눅 15:11-32). 베드로는 주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라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날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볼 때, 언론 매체를 통해 지도자들이나 언론인들, 특히 변호인들 중에는 어디에 가치 기준을 두고 주장하는지 가치관을 혼란케 하는 말들이 난무한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랑케(Leopold von Ranke)는 “역사는 있었던 그대로 보아야 한다. 진실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라는 말을 하였다. 용서에도 진정 모르고 저지른 죄를 회개하고 참회하는 자에게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용서해야 하겠지만, 진실을 의도적이고 지능적으로 왜곡하여 사회악을 조장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응분의 대가와 심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두손과 두발에 못을 박히시면서, 못 박는 로마 병정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아울러 예수님은 회개하는 강도를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도 말씀하셨다. 모르고 잘못을 저지르고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박세라 사모님처럼 “다 모르고 그랬는 걸 뭘!” 하는 주님의 심정이 현실적 사랑으로 나타날 때, 위대한 역사를 창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