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전수자가 되게 하신 것 하나님의 예정하신 역사”
믿음의 가문은 어머니의 순수한 신앙에서의 시작입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봉사하기 위해 중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내려온 오상유 장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참 사람을 길러내겠다는 목표로 교직에서 오랜 세월 봉사하고 정년 은퇴 후에는 가족과 협력해 병원(의정부 오혜숙 산부인과)을 설립하고, 간호학원을 운영하며, 의료봉사와 사회 교육에 힘썼다. 경기도 의정부시의 신앙 유지들이 중심이 된 ‘사랑의 손 복지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섬기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나서고 있다. 백수를 앞두고 있어 몸과 마음이 따르지는 않지만, 지금도 후학들을 기르기 위한 노력과 다문화가족, 한 부모가정을 비롯한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킨 유교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 가진 신앙 유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님은 조부 오용수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로 유학을 한 후 동리의 훈장으로서 후세에게 한문을 가르치셨어요. 선임 훈장의 뒤를 이어 훈장이 되셨던 평안북도 선천군 용연면 성적동은 기독교가 어느 지방보다 빨리 전도되어 교회가 왕성했던 곳이에요. 저희 집안은 이조 연간에 조성된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키는 유교 가문이었어요. 그러다가 일본 세력에 대한 반항 운동인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생하자 선친의 삼형제도 분연히 일어나 만세운동에 참여해 일본인들에 의해 숙청 대상으로 지목되었고, 그 중에도 부정선인으로 선친이 첫째로 체포 대상이 되어 그 당시 유일한 도피지인 만주로 피했어요. 하지만 제가 9세 되던 해에 선친께서는 망국의 한을 품으신 채 병사 하셨어요.”
오상유 장로는 일제 강점기 때 선친을 비롯한 선친의 삼형제에 대한 재판기록을 찾지 못해 독립유공자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어 백방으로 노력 중에 있다고 했다.
“저희 가족은 오늘의 장춘 근처인 길림성 이통현 황두산자 고유수 이가툰(李家屯)에 정착했어요. 이가툰은 중국인 이씨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던 촌장이에요. 아버지가 병사하신 후 어머니 혼자서 어린 삼남매(1남 2녀)를 키워오셨어요.”
어머니의 신앙유산
오상유 장로는 “창세기에 다른 신을 섬기던 데라의 가문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은 묵은 생활습관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낯선 토착민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의 이주에서 시작된 것과 같이, 어머니도 한국인이 모여 사는 촌장에서 사셨지만, 중국인의 땅인 이역에서 어린 세 자녀를 기르며 살아갈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시다가 유교의 집안이었지만 이가툰에서 약 10여 리 되는 조가툰(趙家屯)의 한국인들을 위해 세워진 감리교회에 나가셔서 기독교인이 될 것을 결정하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저희 어머니도 인간이 부딪히고 있는 불행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된 것 같기도 해요. 교회에 나가시기로 결심하신 어머니께서는 10여 리 되는 먼 거리이지만 집회시간에 빠지시는 일 없이 충실한 교인이 되셨어요. 저희 삼남매에게도 항상 교회 출석을 성실하게 하도록 독려 하셨어요. 어머니의 이러한 신앙이 우리 오씨 가문이 가진 완고한 불신의 가문을 기독교화시키는데 첫 선교사가 되어 주신 거에요.”
어머니의 성실한 믿음을 그대로 물려받아 오늘까지 신앙을 지켜왔지만, 6.25 전쟁으로 두 누이가 서울까지 나와서 삼남매가 만날 수 있었지만 오 장로의 어머니는 만주에 남편의 산소를 두고 떠날 수 없다고 해만주에 홀로 남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인해 서울에서 만난 두 누이도 행방불명이 되었고, 어머니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게 된 것이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에 요셉의 유골을 메고 나온 것을 생각하며 부모님에 대한 불효를 뼈아프게 느꼈다고 한다.
장하신 우리 어머니
너무나 죄송합니다.
요셉의 유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탈출하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어머니 모시고 아버지의 유골을 메고
고향을 찾아오지 못한
이 불효자식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오상유 장로의 어머니로 인해 오상유 장로의 부친의 형제들까지도 기독교 가문이 된 것은 루디아가 유럽 전체를 기독교화 시키는 첫돌(행 16:14-15)이 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백부의 아들인 사촌형 오덕유 목사님은 독립군으로 서울까지 내려와 활동하다 체포되어 2년간 복역 후 피어선 성경학교와 한국신학을 졸업하고 교회 목회자로서 서울 용산 보광동교회와 묘동안동교회 등에서 40여 년을 목회하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셔서 지금은 유가족들만 살아가고 있다.
오상유 장로는 해방 후 혈혈단신 조국을 찾아 어머니가 신신히 부탁한 신앙을 가지고 사선인 38선을 넘어 일년 미만의 서울 생활을 거쳐 충북 보은에 정착한 이후 교육계에 몸담았다. 1925년 생인 오상유 장로는 본인의 일생을 두 시기로 분류했다. 중국에서 20년 기간과 대한민국에 정착한 이후 80년 이상의 기간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동안 삶의 고난이 따르는 것을 어찌 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께 받은 혜택도 엄청나게 많았어요. 첫째는 교육계에 종사 할 수 있는 좋은 직업을 나에게 주셔서 보람을 느끼며 살아온 일이고, 둘째는 좋은 아내를 나에게 허락해 주셔서 가정에 만족을 느끼며 자녀를 잘 기를 수 있었던 거에요. 세 번째는 집을 떠날 때에 어머니께서 신신 당부하시던 신앙을 꾸준히 지켜 교회 중직자로 섬긴 일이에요. 직업에 충실했던 것이나 가정생활을 항상 사랑과 감사함으로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라고 여겨져요.”
오상유 장로는 혼자 대한민국으로 내려와 서울사대부설중등교원양성소 사학과 수료, 청주대 법학과 졸업, 충북 보은농업학교, 보은중학교, 청주중학교, 서울 정신여고, 서울신일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서울숭실중고등학교 교감, 서울숭실중학교 교감 및 교장 직무대리, 의정부 경민여자상고 교장 및 경민학원 기획관리실장등을 역임하며 38년의 교직생활을 거쳤다.
믿음의 가정 이루어
오상유 장로는 아내인 故 최순하 권사와 1946년 결혼해 2남 1녀를 믿음 안에서 훌륭하게 키워냈다. 첫째 아들(혜열)은 오상유 장로가 설립한 간호학원장으로, 딸(혜숙)은 오혜숙 산부인과 원장으로, 둘째 아들(승열)은 숙명여대 약대 학과장을 지내고 최근 정년 퇴임했다. 두 부부의 기도로 인해 자녀들은 신앙적으로 신실하게 자라 명륜중앙교회에서 중직자로 봉사하고 있으며. 손자, 손녀들도 사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고 있다.
“가정생활과 교육계에 몸담으며 항상 사랑과 감사함으로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라고 여겨져요. 어머니로 하여금 저와 아내에게 신앙의 전수자가 되게 하신 것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역사가 있음을 믿게 돼요. 저에게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신 여러 신앙 지도자들이 계셨지만 특히 사촌형님 되시는 오덕유 목사님과 명륜중앙교회 전군명 목사님께 감사드려요.”
교회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봉사하고, 가족들과 함께 한자리에 모여 예배드리고 있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시간이라고 했다. 오 장로는 시편기자의 말씀을 빌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라며 현재의 상황에 대해 말하며, 하늘나라의 소망과 함께 이 땅에서도 축복 받은 아름다운 신앙명문 가정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박충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