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은 신성하다. 거룩하고 성스럽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에는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가 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주의 종을 존경한다. 최상의 예의를 갖추어 예우한다. 무엇을 하든, 무슨 말씀을 하든 긍정적으로 순종하려 노력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듣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함부로 비판, 비난하면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하는 태도로 인식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의 종을 향하여 불손한 교인은 싫어한다. 때문에 지금도 설교하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한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세상 풍조도, 가치관이 변하고 문화도 바뀌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멘’해서는 안 될 말씀에도 ‘아멘’하는 웃지못할 풍경을 대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는 목사님의 입에서 시중의 불신자에게서도 듣기 어려운 욕설과 상스러운 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와 아연실색하게 하고 있다.
목사님께 묻는다. ‘목사님, 하나님 앞에서 두렵지 않으세요?’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세요?’ ‘듣는 교인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세요?’ ‘복음 전도에 해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세요?’ 교인들은 또 ‘아멘’ 하는 웃지못할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담임 목사에 대한 우상화인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기름 부어 세우시고 함께 사역하는 다른 목사를 향하여 저주하고, 정죄하며 심판할 수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런 모습이 매스컴에 방영되면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심대하게 가리우고 복음 전파의 문을 막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기를 바란다.
설교는 삶의 변화라는 선한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이런 미움과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설교가 과연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설교자는 성경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향해야 할 책무가 있다. 복음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설교를 하도록 힘써야 한다. 20세기 설교의 대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훌륭한 설교보다 복음을 더 사랑하며, 전례(典禮)보다 설교를 더 사랑하고, 경건의 모양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회중”을 남기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했다. 설교를 설교되게 하는 것은 영적인 은혜를 받게 한다는 사실이다. 좋은 설교자가 되려고 하는 것보다 더욱 귀한 것은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설교자는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는 설교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설교의 생명줄이다. 가치관의 혼란에 빠진 우리 사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이 시대에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이 모든 교회의 강단마다 선포되기를 축원한다.
천주교와 불교에서는 이런 행태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통제하는 기구가 단일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복종한다. 개신교에는 이런 기구가 없다. 교단별 총회와 노회가 있지만 개교회 중심이다. 구속력이 약하다. 더구나 대형교회 목사의 영향력이 총회의 결의조차 약화시킨다. 차제(此際)에 한 가지를 제안한다. 명칭은 연구해서 정하면 된다. ‘공의회’ ‘기독교 자정’ ‘한국기독교 정화위원회’ 등으로 연구해서 정하면 좋겠다. 각 종단별로 대표자를 정하고 파견하여 현안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공식·비공식적으로 입장을 정리하여 ‘주의’ ‘경고’ 등으로 당사자에게 통보해 준다. ‘공개’ ‘비공개’는 사안에 따라 정하면 된다. 구속력이 없어도 상관이 없다. 작금의 바람직하지 못한 개신교 현실을 순결하게 정화하는 데 유익할 것으로 사료된다. 강단은 신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