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어거스틴(St Augustine, AD 354~430)은 이교도 아버지와 독실한 신앙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젊은 시절에는 사생아를 낳을 만큼 타락된 생활을 했다. 마니교(Manicheism)에 빠지기도 했다. 주위에서 누가 봐도 문제아였다. 장래성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의 손길이 주시는 은혜는 측량할 길이 없다. 누가 하나님의 길과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평생을 두고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전한다. 지금까지도 모니카(Monica)는 기도하는 어머니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다. 성 암브로스(St Ambrosius)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으나 불안정했다.
어느 날 정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것을 받아 읽어라. 그것을 받아 읽어라”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사도 바울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 사제, 철학자, 사상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1500년이 더 흐른 지금도 기독교인이면 읽어야 하는 고전으로 <참회록>(Confessions)과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을 남겼다. 마음은 의지의 행위를 행하라고 하지만 이행하지 않는 자신을 냉정하게 발견했다. 자신 안에 두 개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내 속에 거하는 죄의 원리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감추어진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께서는 자비 안에서 채찍으로 치셨다. 그 채찍은 두려움과 수치였다. 왜 추한 죄를 그만 두지 못하는가? 죄의 포로가 된 자신을 보면서 어거스틴은 울었다. 왜 자꾸만 ‘내일’ ‘내일’ 하는가? 왜 자꾸만 미루고 있는가?
<참회록>과 함께 <하나님의 도성>(신국론, 新國論, City of God)은 불후의 명저다. 기독교 고전이다. 당시에는 교부 철학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교부 신학이 담겨진 명저이다. 영원할 것 같은 로마 제국이 고트(Goth, 프랑크인)족에 의해 점령, 약탈되었다. 로마 제국에 석양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 시민들은 당혹해 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392년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받아들일 것을 선포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 망하다니! 심리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민들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깊은 절망과 허탈감 그리고 회의(懷疑)에 빠졌다. 그들은 어거스틴에게 물었다, 그에 대한 답변서가 바로 <하나님의 도성>(신국론, 新國論)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都城)과 세상의 도성을 따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은 별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가 육신의 시련과 고난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 시련과 구원의 은혜는 완전히 별개 문제다. 어거스틴은 인류를 두 부분으로 분류했다. 하나는 인간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세상의 도성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도록 예정된 하나님의 도성이다. 세상의 도성은 악마와 함께 버림받을 세상 문명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초자연적인 실체에 눈길을 돌린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향한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가는 순례자의 찾아 가는 길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