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의 일이다. 4학년 대학생에게 도서정리를 부탁한 적이 있다. 책 제목과 저자를 적어서 목록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한참 정리하다가 책 한 권을 가져오더니 제목을 어떻게 읽는지를 필자에게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 책을 보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요즘에는 책의 제목과 내용이 모두 한글로 쓰여 있지만, 그 책은 오래전에 출판된 책으로 제목이 한자로 되어 있었는데, 제목이 경제학원론(經濟學原論)이었던 것이다! 요즘 학생들이 아무리 한자를 잘 읽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경제학을 한자로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것이 바로 한글전용의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우리말 대다수는 한자어에서 유래하였고, 한자를 모르면 그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같은 발음이지만 전혀 의미가 다른 단어도 많으므로 순 한글로만 표기하게 되면 의미가 통하지 않거나 큰 혼동을 가져오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요즘 학생들이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한자 교육이 실종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글전용은 1945년 이후 우리나라 어문정책의 일관된 정책 방향이었다. 어문정책의 근간이 되는 국어기본법은 모든 공문서는 한글로만 작성해야 하며 초중등학교에서 한자 교육은 필수적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 결과 1995년부터는 중요 일간지들이 한글전용을 채택함으로써 우리나라 일상생활에서 한자는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한글전용에 대한 찬반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2016년에는 국어기본법이 위헌이라는 주장이 헌법재판소에 정식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헌법소원을 청구한 시민단체와 대학교수들은 국어기본법이 한글전용을 강요하고 한자를 문화생활에서 배제해서 ‘언어를 통한 인격 발현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한글 전용정책이 위헌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글전용 반대론자는 문자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서 편의에 따라 사용되어야지 한글만이 우리글이라는 주장은 국제화 시대에 편협한 발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찬성 측은 한자 없이도 충분히 의미가 전달될 수 있을 뿐아니라 어려운 한자가 오히려 일반인에게 부담이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현행 기본법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함으로써 법정에서는 일단락된 셈이지만 여전히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 같다.
필자는 일상생활에서 한자가 사라지면서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온 우리나라 문화전통이 단절되고 정신세계의 온축이 사라져가는 것을 깊이 우려한다. 사실 다양한 개념어 중에 순우리말은 그렇게 많지 않다. 게다가 근대에 들어와 새롭게 도입된 개념들, 예를 들어 민주주의, 사회, 철학, 개인 등의 개념은 개화기 일본인들이 서양의 단어들을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 개념의 정확한 의미는 어원이 되는 한자를 모르고서는 깊이 있는 이해가 불가능할 것이다.
동양고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논어, 맹자 등의 고전과 옛 선인들의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시와 문학도 모두 한자어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한자를 모르면 그 깊은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서양에서는 아직도 라틴어를 중고등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도 오랜 문화전통을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디지털시대에 한글이 얼마나 우수하고 실용적인지 잘 알기 때문에 한글 전용정책에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천 년 정신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한자를 어문교육에서 배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김완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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