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하나님 살려 주시면 장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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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갑네 교회 친구 안만수 목사가 안수집사 때의 일이다. 장로피택이 되어 장로고시를 봐야 하는데 당시 화공약품회사 사장인 안만수는 세상 재미에 빠져 미국 바이어 만나러 간다고 핑계대고 장로고시를 피해 미국으로 도망갔다. 며칠간 바이어를 만나고 귀국 앞둔 어느날 몇 사람이 모인 음식점에서 안만수 사장이 위스키잔을 들다가 푹 쓰러지면서 “하나님 살려 주시면 장로하겠습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장로고시 기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쓰러진 안만수 사장은 그 길로 심장병이 생겨 로스엔젤스에서 두 달을 치료해도 낫지 않았다. 

출석교회인 강서구 화성교회 황옥순 아내에게 암만해도 미국에서 죽을 것만 같다고 풀죽은 소리로 전화했다. 아내는 “무슨 소리냐? 온 교인이 당신 위해 합심기도 하고 있다. 당신 가슴에 압박 붕대라도 감고 당장 한국으로 건너오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살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안고 안만수 집사는 무사 귀국했다. 우선 회사를 정리하고 집도 팔아버리고 조그만 집으로 갔다. 그해 장로투표에 떨어질까 전전긍긍 하더니 다시 장로 피택이 되었다. 1978년 가을 장로 안수를 받았다. 

나와 장경재 담임목사를 도와 신앙노선을 합신으로 바꾸는데 함께 힘을 쏟았다. 그리고 사당동 총신대 신학생이 되었다. 1학년 때 합동신학대학원으로 학적을 옮겼다. 교회 청년부 지도를 하며 신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7월 4일 방배동에 화평교회를 개척하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다시 대치동으로 옮겨 교회를 부지런히 섬겨 나갈 때 합동신학교 초대 교장 박윤선 목사님이 개척하신 장안교회와 합치라는 권면 따라 1987년 부활주일에 화평교회 이름으로 합쳤다. 역삼동에 새로 자리잡은 화평교회를 시무하면서 1987년도 9월 합신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모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재단이사가 되고 2001년 초 이사장 장경재 목사 소천으로 안만수 목사는 모교 재단이사장이 되었다. 

대외적으로 복음주의협의회 활동도 열심히 했다. 나와는 미국 중국에 선교여행도 함께 했다. 합신 재단이사 활동도 함께한 친구였다. 영음사 출판사도 맡아 박윤선 목사님 저서 출판을 많이 했다. 온화한 인품에 사랑도 많았다. 장로 안 하겠다고 미국으로 도망갔던 안만수 목사는 하나님이 강권적 사랑으로 장로뿐만 아니라 목사로 주님을 섬기게 하셨다. 그리고 총회장 직분까지 누리게 하셨다. 2009년 4월 26일 화평교회 원로목사로 교회 강단은 내려 와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사장으로 2017년 3월 10일 하늘나라 가기까지 학교 발전에 기도와 땀을 쏟았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둘째 아들 안상혁 교수가 명강의를 하며 아버지 안만수 목사 뒤를 이어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잘 섬기고 있다. 1975년도 여름 화성교회 갔을 때 안만수 목사는 부모님이 장로 권사님으로 믿음의 가정 촉망되는 아들로 고려대 영문과 출신이었다. 3남 4녀의 형제들의 우애도 두텁고 모두 교회 장로 권사였다. 매제들도 교회 남전도회 회장을 맡거나 교회 중책을 맡아 봉사했다. 맏형인 안철수 장로는 아우 안만수와 같이 화성교회에 성실하게 시무했다. 은퇴 후 일산에 현산교회 개척에 앞장 섰다. 형제가 화성교회 장로로 시무했다. 안철수 장로는 나와 해병대에서 싹튼 믿음단체 열두얼회 회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안철수 장로는 아우 안만수 목사 발인식이 있던 날 나와 광주시 오포읍 미리 마련해 둔 납골당에 함께 갔다. 형인 자기와 함께 잡아논 납골당인데 안만수 목사가 납골당에 제일 먼저 왔다고 아우 소천을 아쉬워 했다. 장로 기피하고 미국으로 도망갔던 안만수 사장을 하나님이 장로 목사 일꾼으로 쓰셨으니 오직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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