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순교신앙 회복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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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시대부터 있었던 교회사 속에 나타난 ‘순교’는 죽음보다 오히려 증언의 측면이 더 강하였다. 그래서 ‘순교’에 해당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발견할 수 없다. ‘순교’에 대해 이해하고자하면 우선 ‘증언’, 혹은 ‘증언자’라고 이해되는 ‘마르티리움’ 과 ‘마르투스’에 대한 어원적 고찰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마르티리움’ 과 ‘마르투스’의 어의적 변화를 통해 증언, 증인이라는 단어에 죽음의 의미가 더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를 ‘순교’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아직 ‘순교’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범적 정립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보다 100년 앞서 들어와 수천 명의 순교자를 낸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펴낸『한국가톨릭대사전』은 ‘순교’를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죽음을 당한 상태, 그리스도의 진리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진실성을 죽음으로써 증명하는 행동,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살해되는 것,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기꺼이 받아들이고 겪는 죽음의 경우”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순교’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박해를 받다가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하거나 협조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월 둘째주일은 총회순교자기념주일이다. 제107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순교자기념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순교신앙이 회복되고 지속되어지길 기도한다. 

매년 지켜오는 순교자기념주일이지만 순교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순교자 유족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은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는 분위기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가 주목할 수 있도록 성장한 것은 순교자들의 헌신과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복음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듯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그 복음의 전도자로 사용하기 위하여 부르신 것이며, 이를 위해 철저히 준비케 해주셨다는 고백위에 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올 때, 이미 조선 사람들에 의하여 성경이 번역되었고, 선교가 공식화되기도 전에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들어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질 옥토를 만들어 놓으셨다. 또한 그 씨앗이 옥토에서 ‘순교’라는 고난의 양분을 먹어 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역사를 이끌어 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에게 진 사랑의 빚조차도 갚기를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으로 온 세상이 혼란 속에 빠졌으며 특히 코로나의 확산으로 인해 신앙생활 자체를 크게 위축시켰으며,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우리의 신앙과 교회 생활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순수했던 우리의 신앙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순교신앙정신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순교의 진정한 의미를 정립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순교는 첫째, 인간의 의지나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의 사건이라는 고백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비우고 헌신하는 제자도의 실천으로부터 시작하는 자기희생 정신에서 출발할 때만이 진정한 순교인 것이다.  셋째,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라는 수식적 은총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수평적 구원사가 교차하듯이, 개인적 차원의 수직적 충성과 공동체 차원의 수평적 선교가 교차하는 신앙 행위의 결과를 토대로 오늘의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을 재조명해 보아야 한다.  

순교기념주일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쇠렌 키에르케고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재자가 죽으면 그의 통치는 끝나지만, 순교자가 죽으면 그의 통치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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