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교회, 전국서 많이 모이는 교회 중 하나
순수 한국 교인들 헌금… 금강산 수양관 완공
마산교회를 사임할 때 후임자로 평양에서 한 목사에게 전도 받고 후일 목사가 된 박정찬 목사를 천거했다.
한석진 목사는 한동안 모든 시름을 잊고 농촌 생활을 하며 심신을 휴양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때 1919년 봄 3.1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당하게 됐다. 신의주교회 김병농(김관근 목사의 조카) 목사도 수감됐다. 한석진 목사가 백마에 은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청빙할 때 한 목사는 교회를 위해서 신의주교회에 부임했다.
교회 형편을 생각할 때 목자 잃은 교우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며 신앙적 용기를 돋우었다. 한 목사는 예배 분위기를 쇄신했다. 예배시간에 이야기하거나 여름철 부채질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졸거나 헛기침, 머리를 흔드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불경스러운 짓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쳐 꾸짖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어디까지나 단정하고 엄숙한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신의주교회에서 예배 보는 사람들은 마치 부처님을 모셔다 놓은 것 같다”고 하는 말이 돌았다.
이것은 한 목사의 인격이요, 선진국 집회에서 갖는 태도를 가르쳐서 처음부터 교인들의 정숙한 습관을 길러주었다. 교인들은 모여들었다. 신의주교회는 전국에서 많이 모이는 교회 중 하나가 됐다.
1921년 공사비 1만3000원을 들여서 총건평 125평 벽돌 2층 예배당을 건축하고 다음 해 인접한 땅 약 200평을 사서 부속 건물을 증축하고 소속 교육관으로 신명유치원과 신명학원을 설립했다. 한 목사의 특징은 외부 원조를 받지 않고 본 교인들의 힘으로 건축하는 것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건축했다. 1921년 신의주 제일교회를 분립했다. 한석진 목사는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10년을 목회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교회 목회로는 가장 오랜 기간이었다. 한 목사나 교회 성도들이나 헤어지기 섭섭했다. 한 목사는 자기의 마지막 헌신할 일이 금강산 수양관 건축이라고 여기고 결단했다.
1927년 총회에서 금강산 수양관 건축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의하고 건축 책임을 맡았다. 예산은 3만 원이었다. 금강산에 수양관 건축의 의의는 세 가지였다. 첫째, 불교 사찰만 있는 곳에 기독교 수양관을 건축함이요, 둘째, 목사들이 기도할 수 있는 집, 노년에 거할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금강산을 세계적 명소로 소개한다는 것이었다.
총독부에 수양관 대지 대부를 신청하여 10년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금강산 온정리에 8천여 평의 국유지 임야를 대부받아 석조 2층 강당과 기숙사를 세우기로 하고 1927년 건축 기성회를 조직했다. 한석진 목사는 한 손에 성경책, 다른 손에는 환등기를 들고 전국을 돌며 사경회를 하면서 모금했다. 사경회에서 금강산 수양관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 많은 성도에게 큰 반응을 일으켰다. 순수 한국 교인들의 헌금으로 금강산 수양관을 완공했다. 공사 1년만인 1930년 가을 9월에 만물상의 삼선 암(三仙岩)을 서쪽으로 바라보며 높이 솟은 수정봉(水晶峯) 밑에서 동해를 눈앞에 내다보는 한하계(寒霞溪) 골짜기 사다리골, 맑은 시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계곡 중앙지대 가장 좋은 위치에 한 목사가 오래 꿈꾸던 수양관의 준공을 보았다. 1931년 9월 11일 제20회 장로교 총회를 금강산 수양관에서 모여 헌당식을 거행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